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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생활사 (차윤정)

 나뭇가지에 자잘하게 흩어져 내리는 빛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예초에 빛이 천지창조 제일의 영광 이었듯, 자연 제일의 축복이다. 만물은 봄 빛의 주문으로 깨어난다. 빛을 가리는 잎이 없어 온전하게 땅으로 내려온 빛은, 적당한 밝기의 길이와  파장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 땅속의 씨앗들을 부추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씨앗들은 빛이 전하는 메세지를 충분히 알아듣는다. 일어나라! 봄이 왔다. 빛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물들은 내부에 빛의 모든 성질을 파악하는 감지기와 전달기, 그리고 반응기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 식물의 세포마다 연결된 통로들과 이를 통해 전달되는 이온의 움직임은 동물의 신경계를 연상시킨다. 식물의 모든 조직에는 개별적인 빛 탐지 센서가 들어 있다. 빛의 탐지와 관련된 수용체는 세포내에 존재하는 아주 다양한 식물 색소들이다. 이들은 빛의 성질을 파악하여 여러가지 생화학적 과정들을 조절함으로써, 빛에 대한 일련의 사고 작용을 하게 된다.

 

식물이 공간과 계절, 밤낮을 탐지하고 심지어 경쟁자를 탐지하는 것조차 빛의 성질을 통해서이다. 식물의 활동과 관련한 빛의 성질은 밝기와 길이와 파장의 세가지이다. 빛의 밝기는 빛의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식물은 낮이 되어 어느 정도 빛의 밝기가 보장되어야 활동을 시작한다. 빛의 길이가 곧 낮의 길이인데 겨울동안 낮의 길이가 밤보다 짧을 경우  식물은 휴면한다. 파장의 효과는 식물이 선호하는 빛의 질을 말하는 것으로 식물은 대체로 가시광선내 적생광 부근의 파장을 가장 선호한다. 

 

높은 나무 아래서 낮게 자라는 식물은 빛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아래층 식물에 도달하는 빛의 양이 적고, 세기도 약하며, 이미 상층에 위치한 나무에게 적색광이 흡수된 뒤라,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파장만이 들어올 뿐이다. 그래서 대부분 아래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이렇게 빛이 부족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잎이 넓고 얇으며 옅은 녹색을 띤다.이른 봄 수많은 식물들은 큰 나무들이 빛을 차단하기 전에 피었다 사라지는 운명을 택하기도 한다. 대체로 숲의 상층을 차지하는 나무들이 완전하게 자라기 전까지, 작은 식물들은 최대한 빛을 이용하기 위해 이들보다 일찍 잎을 틔운다. 그래서 숲바닥에 가장 먼저 식물이 피어나고, 그 다음 중간 높이를 차지하는 식물들이, 최후에 숲의 덮게를 이루는 큰 나무들이 잎을 틔운다. 이러한 질서는 매년 반복된다.

 

들판에는 해를 가리는 덤풀이나 나무들도 없고 경사도 없이 평평하여 빛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 겨우내 빛을 가장 마음껏 받고 있었던 것도 바로 들판이다. 3월이 다가도록 누렇게 말라있는 지푸라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층만 살짝 걷어보면 보드럽게 녹아 있는 흙을 볼수가 있다. 지푸라기는 들판의 낙엽이다. 갈아엎은 논바닥에서 푸르스름한 풀색이 베어나오고, 햇빛은 다정하게 논바닥을 어루만진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생긴 실핏줄 같은 공기 구명을 통해, 물기가 공기중으로 흩어짐에 따라 겉흙은 푸석푸석하게 마른다. 흙의 촉감은 따스하다.

 

봄에 피는 들꽃의 한결 같은 특징은 생활사가 짧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여름, 가을이 낯설다. 빛의 양이 많아지면 크고 무성한 생명들이 지배권을 주장하기 때문에, 서둘러 이른 봄에 잠깐 피었다 사라진다. 몸체는 비록 작으나 들판의 꽃들은 매우 튼튼하다. 꽃대도 실하고 이파리도 실하다. 들판의 꽃들에 비해 숲의 야생화들은 빛에 관한한 최고의 약자들이다. 복수초, 얼레지, 바람꽃, 현호색 등은 푸석한 낙엽 위에서 피어나는 생명들이다. 이들 위에서 자라나는 나무 잎들이 빛을 차단하기 전까지 빛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야 한다. 빛에 대한 욕구는 어느 식물이나 동일하지만, 오랜 습관은 본성이 되어 이들에게 들판에서와 같은 강한 빛은 오히려 부담스럽다. 그래서 들판의 꽃은 숲으로 들지 않고, 숲의 야생화는 들판으로 나서지 않는다. 들판의 꽃들에 비해 뿌리가 깊지도 않고, 줄기가 강하지도 않다. 이른봄 낙엽더미 위에서  펼쳐지는 야생화들의 삶은 크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바람도 조심스런 이른 봄에 서둘러 피었다, 서둘러 사라지는 작은 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봄의 야생화들은 빛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강자다.

 

3월의 봄볕을 가득모아 4월이 되면 조팝나무의 하얀 꽃 잔치가 나무들의 봄을 선언한다. 논두렁이 푸른 빛깔로 한겹 봄 옷을 입으면, 무리지어 푸석거리던 지푸라기 같은 줄기들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어느 순간 힘 없이 쳐저있던 줄기들이 탄력있게 솟아오르며,  하얀 꽃들이 눈처럼 쌓인다. 드디어 나무들이 긴 겨울 잠을 깨어난 것이다. 조팝나무 하얀  꽃무리는 봄의 하얀  햇살을 그대로 담고 있어, 묵은 마음이 눈처럼 환해진다. 숲 안에서 덤풀이 일어서는 것은 마치 유령이 일어서는 것과 같다. 휑하니 비어있는 공간에 드문드문 푸른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가하면,  붉은색 점들이 공중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점들은 도깨비 불 같이 깜박거리며 여기저기 모여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푸르고 붉은 점들은 연결되어 가느다란 줄기를 만들고 꽃송이를 만든다. 휑하던 공간에 작은 나무들로 채워진 것이다. 아직 큰 나무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빛은 고스란히 작은 나무들에게 축복이 된다.

 

덤불이 지켜야 할 몇가지 규칙이 있다. 덤불은 허용된 공간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큰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숲덮개를 만들어 나가는 높이를 넘 볼 수 없다. 덤불은 굵고 힘찬 가지를 내지 않는다. 그것은 낭비이며 비효율적임을 안다. 그래서 가능한한 가지를 벌리고, 다양한 각도에서 떨어지는 빛을 받아들이기 쉬운 자세를 취한다. 들판이든, 숲이든 빛의 마지막 소유는 키 큰 나무들이다. 지상 높은 곳까지 물을 조달하기 위해 나무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키 작은 생명들이 빛을 이미 나누어 가졌다. 잎들이 완전히 자라 서로를 포갤 때쯤이면, 사실상 봄은 싱그운 것이 된다.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두꺼워지면 숲은 거대한 폐쇄 공간이 된다.

 

숲 초창기에 산벚나무는 풍부한 빛을 토대로 왕성하게 성장한다. 왕성한 성장으로 인해 생긴 유기물들은 숲의 물질량을 증가시켜 숲의 잠재력을 키운다. 빈약한 땅에 큰 숲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빠른 생장속도, 많은 양의 낙엽 생산, 그리고 부드러운 육질의 몸체, 장차 숲의 점령자에게 제공되는 제물들이다. 숲의 기초를 다지면 여기저기 동물들이 모여들고, 나무열매도 운반된다. 신갈나무,졸참나무 같은 나무들의 종자도 운반되고, 서어나무  단풍나무 씨앗도 날아든다. 비교적 늦게 숲으로 들어온 나무들은 어두운 숲에도 단련되어 있어, 어린 시절 덤불 속에 가려지더라도 여전히 견디며 성장한다. 봄이 오면서 새롭게 피어난 잎들은 대부분 연한 빛을 띠고 있어, 겨울 동안 버티고 있었던 칙칙하고 무거운 색의 소나무 잎과 대조된다. 작고 연한 빛들이 크고 두텁게 자라, 짙은 색으로 바뀌면 나무간의 구분이 없어진다.

 

빛은 탄소동화작용을 위한 에너지원이기도 하지만 일부는 열로 전환되어 식물체 내의 대사과정을 관장한다. 해가 길어지고 빛이 강해지는 것은 곧 열과 빛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꽃이 피려면 빛과 열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수없는 봄이 반복되면서, 식물들은 빛과 열에 적응해 왔다. 빛은 지구와 태양과의 관계로 발생되어 거의 항상적이다. 반면 열은 지구내부 사정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 최근들어 빛과 열의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봄이 점점 여름처럼 덥고 일찍 찾아온다. 이런 고온 현상은 식물들의 질서를 교란 시킨다. 식물둘운 갑작스런 고온 환경에 맞추어 생체시계를 작동시킨다.

 

꽃이 피어나는 시기가 혼란스러우면, 곤충의 방문이 뒤죽박죽 되며 동시에 종간의 교잡이 무질서해진다. 섣부른 개화를 한 식물들은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곤충들로 인해 수분 일정에 차질을 빚는다. 매개 곤충을 만나지 못한 식물은 쭉정이가 많아진다. 신록의 빠른 생장으로 부드러운 잎을 먹는 애벌래들의 생활사를 비껴간다. 잎의 조직이 빨리 생성되면 알에서 애벌래가 깨어날쯤, 이미 잎은 딱딱하고 질겨져 있다. 애벌레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기온이 올라가면 빙하가 녹고 바닷물 수위가 상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숲에서 꽃들이 씨앗을 맺지 못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되지 못한다.

 

숲이나 자연은 환경변화에 대해 완충능력을 가진다. 점진적인 변화는 새로운 적응종을 만들어 내고 적응기관을 발달시킨다. 생물들이 적응하기에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흐름을 놓쳐버린 생물들이 여기저기 생태계 구멍을 만들고 대재앙 불씨를 당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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