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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패멀라 D.

더 가까이 : 혁신과 이주의 시대 1

남북전쟁이 일어난지 반세기가 지나가고, 세계는 혁신과 이주의 시대로 특징 지어진다. 미국은 2차산업혁명을 시작하고 급속히 현대세계로 이끌려 간다. 사업가들과 공상가들은 순수과학의 발견을 실용품으로 변모시킨다. 새로운 기술중 일부는 매일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한다.  미국에서 일어난 2차산업혁명의 원동력은 수백만 명의 이민자였다. 미국은 인종의 전시장이며 아이디어의 도가니이다. 철도와 증기선, 전신, 라디오에 의해 인간은 이전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연결된다. 사람과 정보가 100년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빠른 속도로 돌아다닌다. 물질질 진보가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심층적으로 우리와 지구의 관계,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바꾼다. 또한 이전에 보이지 않던 현실적 장애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한다. 미국 독립전쟁후 여러해 동안 세계는 증기와 철의 시대에서 전기와 강철의 시대로 기계의 시대에서 전기 기계의 시대로 이동했다. 운송과 통신, 제조와 건설분야에서 엄청난 도약이 이루어졌다. 앤드류 카네기는영국의 발명가 헨리 베서머가 개발한 강철 제조기술로 철강산업을 혁신한다. 헨리포드는 독일의 카를 벤츠와 고틀리프 다임러가 1885년 각기 개발한 내연기관에 대량생산 기술을 결합하여, 자동차를 일상으로 들여왔다. 공장이 번창했다.

 

1860년 미국 제조업은 국민총생산의 12%를 담당했다. 2차산업혁명의 즉각적인 효과가 모두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도심지는 1차산업혁명 동안의 런던 빈민가만큼이나 더럽고 붐볐다. 미국 노동자 계급의 40%가 1년에 5인가족을 충분히 먹이는 데에 필요한 500달러를 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2차산업혁명의 혜택이 하층민까지 퍼지고, 부자만 누렸던 상품과 서비스를 이제 보통사람도 누릴수 있게 되었다. 헨리포드의 자동차 생산라인은 자동차를 사치품에서 대량판매 제품으로 바꾸었다. 2차산업혁명은 1869년 대륙횡단 철도의 완성으로 한차례 일단락 되고, 수송의 실질 수단으로서 항공과 자동차가 발전함으로써 다시 일단락을 지었다. 

 

1903년 12월14일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키티호크. 라이트 형제는 최신 글라이더의 시험비행을 실행한다. 그러나 고작 12초동안 36미터를 날았을 뿐이다. 집요한 도전으로 59초동안 260미터를 날았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은 유럽과 미국에서 영감을 제공했다. 양 세계대전 사이 몇년동안 비행기는 급증한듯 보였다. 1927년 찰스 린드버그가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비행에 성공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과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추축국이 띄운 군용기에 탑재된 폭탄은 유럽과 일본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 비행하고 44년 지나자, 미국 조종사 척 이거는 음속보다 빨리 날랐다. 미국에서 시작된 2차산업혁명은 1차산업혁명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멀리 확산 되었다.

 

반대쪽 세계에 있는 나라들 중에는 일본이 유일하게 보폭을 맞춰 중세에서 근대로 이동했다. 도쿠가와 막부 휘하에서 사무라이들은 더는 싸울 전쟁이 없기에 어려운 처지에 처했다. 그럼에도 무사전통을 지키기 위해 정부명령에 따랐다. 어떤 일들은 공무원이 되거나, 상업을 시작했다. 더 많은 이가 특히 대도시에서는 실직자가 되었고 부족한 보급으로 살고자 고군분투했다. 사무라이는 메이지유신의 일환으로 1871년에 시작된 일련의 조치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최신식 무기를 갖춘 정부군에 대항해 전통 무기를지닌 사무라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1874년 무렵 이와사키 야타로는 자수성가한 근대 일본인이었다. 정부로부터 헐값에 사들인 증기선 열세척을 어디에 투자할지 물색하고 있었다. 1870년 이와사키는 해운회사를 설립하고, 이름을 미쓰비시라고 지었다. 미쓰비시는 가장 큰 해운회사가 되었다. 수년동안 미쓰비시는 석탄광산, 구리광산, 철도, 보험회사 등을 사들였다. 미쓰비시는 조선소를 사들였고, 선박제조로 확장해 1895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철제 증기선을 만들었다. 2차대전 동안 미쓰비시는 일본에서 가장 큰 전함과 전투기를 만들었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2위의 선박, 자동차 생산국이고 세계3위의 부자국가이다. 원재료를 실용적인 제품으로 바꾸고, 2차산업혁명의 조립라인에 돈을 댔던 발명가와 유례가 없는 규모의 부와 물질적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세계를 근대산업화시대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천연 자원을 추출하던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삶은 16세기의 은광산, 1세기의 로마 도로, 상수로에서 힘겹게 일하던 조상의 삶과 다를바가 없었다.

 

뉴욕의 거지 찰스 굿이어가 아마존 열대우림의 고무나무에서 채위한 끈적거리는 고무나무 수액으로 실험을 하고 있었다. 굿이어는 이물질로 실험한지 10년이 되었고, 다양한 화학약품을 혼합하였다. 이 발명가는 고무가 사람들의 생활을 바꿀 것임을 보여준다. 찰스 굿이어는 생고무를 산업시대의 가장 귀중한 상품중 하나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발견했다. 찰스 굿이어의 처리법에 의해 고무는 은만큼 값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적적인 물질이 근대세계의 가장 위대한 발명중 하나인 자동차를 비롯해 엄청난 기술적 도약을 가능하게 했다. 산업혁명은 시작부터 이면이 함께 했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적은 임금과 열악한 환경의 작업장, 아동 노동, 새로운 산업도시의 빈민가, 산업화학제품에서 오는 질병, 안전장치 없는 기계로 말미암은 사고가 그것이다. 2차산업혁명의 가장 추한 장면은 중앙아프리카에서 펼쳐졌다. 고무호스와 배관 , 개스킷, 절연재에 대한 산업수요가 전 세계에 고무의 대유형을 일으켰다. 그리고 콩고에서는 정권의 공포통치를 촉발했다. 19세기말에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알려진 제국확정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15세기부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더 깊이 관여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해안가에 무역거래소를 세우고 알제리와 남아프리카에 전략적인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렇지만 정작 아프리카의 국내 문제는 방치 했다. 1870년대에 들어 영국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이러한 쟁탈전의 명분을 기독교와 상업, 그리고 문명의 전파로 요약했다. 전쟁의 동력은 유럽국가간의 경쟁이었다. 영국이 가장 강력한 큰손이었으나 남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확장하고, 이집트를 점령하고 나이지리아에 대해 영토권을 주장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도,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도 아프리카에 열성적이었다. 레오폴드를 위해 일하던 탐험가 헨리 모턴 스탠리는 정글을 관통하는 도로 322킬로미터를 닦았고, 아프리카 추장 2000명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1884년 분쟁중인 아프리카 국가들의 운명을 결정하고자 베를린에 모였을 때,   레오폴드 점유를 비준했다. 레오폴드는 이 새로운 왕국을 콩고 자유국이라고 불렀다. 콩고의 레오폴드 정부는 사람들을 노예와 다름없이 대했다. 나라 전체를 상아수집에 알맞게 재편하고, 열대 우림에서 나오는 고무돈을 버는데 관심이 쏠렸다.  콩고의 성인 남성들은 의무적으로 정해진 량의 고무를 채취해야 했다. 레오폴드의 군대, 사실상 폭력배들은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하는 마을들을 덮쳐 여자들과 아이들을 볼모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