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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패멀라 D.

더 가까이 : 혁신과 이주의 시대 2

1904년 5월 존 해리스 침례교 목사와 아마추어 사진가 아내인 앨리스, 이 영국인 부부는 1898년부터 선교를 위해 콩고자유국에 살고 있었다. 은살라라는 남자가 이 부부를 찾아왔다. 은살라는 할당량인 고무 수액을 채우지 못해 레오폴드 왕의 군인이 아이의 손과 발을 잘랐다고 이야기 했다. 앨리스는 카메라로, 남편은 펜으로 식민지 관료들과 군인들이 콩고사람들에게 저지른 참상을 기록했다. 레오폴드는 결국 통치권을 벨기에 정부에 넘겨야 했다. 그의 가혹한 정권은 직간접적으로 1000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레오폴드 왕은 왕좌에서 쪼겨나는 망신을 당했지만, 아프리카에서 유럽의 식민통치는 지속되었다. 또 60년간의 투쟁후에야 아프리카의많은 나라가 독립을 회복했다. 아프리카가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미국은 인간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규모로 이루어진 자발적인 이주 덕분에 풍요를 누렸다. 1880년과 1923년 사이 2100만명이 줄지어 미국으로 들어왔다. 독일인과 아일랜드인이 초기 이민물결을 주도했다. 20세기로 넘어길 무렵 이민자중 다수가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왔다. 초기 이민자들처럼 일부는 자유를 찾아서 또는 박해를 피해서 왔다. 더 많은 이가 부자가 되려고 왔다. 대서양을 황단하는데는 6일가량 걸렸다.

 

뉴욕항으로 들어온 배는 먼저 맨해튼에 낯을 내리고, 1등실과 2등실 승객을 내려주었다. 그러고 나서 페리 보트가 3등실 이민자들을 태워서 앨리스섬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 있는 1892년 개설된 출입국 관리소에서 이민절차를 처리했다. 이민자들은 앨리스섬을 눈물의 섬으로 불렀다. 이민자 대부분은 도착 당시 영어를 거의 또는 전혀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이웃하며 모여 살았고, 그 때문에 작은 이탈리아, 작은 폴란드, 작은 독일이 생겨났다. 일은 고되고 봉급은 적었다. 이민자 대부분은 2차 산업혁명에 의해 형성된 편의시설이 전혀 없는 과밀한 도심의 공동주택에서 살았다. 최초의 예술가가 동굴벽에 들소를 그리던 순간부터 인간은 소통을 위해 더 적절한 방법을 궁리해 왔다설형문자, 구텐베르크의 이동식 활자, 줄의 매듭 개수나 간격으로 나타내는 잉카의 결승문자, 배 돛대의 깃발신호, 등대의 불빛, 모두가 목적은 동일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보를 공유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다. 19세기에 인류는 전기라는 에너지원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시작했다. 새무얼 모스는 그것을 최초로 통신수단으로 이용했다.

 

전화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에서 소개했는데, 이 또한 전자전류를 이용해 소리를 전송했다. 전화와 전신 둘다 먼거리를 넘어 즉각적인 통신을 가능하게 했는데, 50년전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일이다. 특히 바다에 떠있는 배가 육지의 사람들과 연락할 길이 없었다. 굴리엘모 마르코니는 이 모든 것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아직 20대이던 마르코니는 송신자와 발신자 사이에 전선이나 다른 물리적 연결없이 수천킬로미터를 가로질러 빛의 속도로 메시지를 전달할 실절적인 방법을 궁리했다. 마르코니는 1894년 장파장 전자파에 관한 하인리히 헤르츠 연구를 읽고, 무선전신 개발에 착수했다. 헤르츠는 전기와 자기가 결합된 전자기가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장애로서 존재하며, 그 진동은 가시광선이나 가청음과 비슷하게 물결처럼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라디오파이다. 이후 6년 동안 마르코니는 전선없이 전자신호를 전송할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1901년12월12일 마르코니는 183미터 안테나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대서양 너머로 메시지를 보내는데에 성공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석달후 모든 외항선은 무선통신기기를 탑재해야 하고,  24시간 내내 켜두어야 한다는 국제규약이 제정되었다.

 

라디오 방송은 1920년대에 뉴스와 음악방송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마르코니의 무선통신기술은 모든 곳에 영양을 미치고 있다. 차고 문 자동개폐기와 GPS시스템, 위성통신, 전파망원경, 휴대전화, 무선인터넷, 그리고 테블릿 컴퓨터와 판독기 외에도 무선통신에 의존하는 기기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1차세계대전 초기에 인간은 가장 오래되고 치명적인 적, 바로 박테리아와의 싸움에서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의 외과의사 조지프 리스터는 수술에 쓰이는 소독제를 만들었다. 프랑스 루이 파스테르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콜레라와 파상품, 디프테리아, 결핵같은 병의 원인으로 세균을 지목했다. 과학자들은 박테리아를 적으로 규명했지만, 아직 그것이 대항할 무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알렉산더 플레밍은 세균이론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의사중 한 사람이었다.

 

전쟁터에서 플레밍은 수천명의 부상병이 파상풍과 패혈증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플레밍은 소독약을 적신 붕대로 상처를 싸매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박테리아를 죽일수 없었다. 되도록 죽은 조직을 많이 제거하고 나서 상처를 살균식염수로 씻어내면 박테리아가 떨어져 나가고, 신체가 새로운 백혈구를 생성한다는 것이었다. 1928년 플레밍은 작업대 위에 있는 배양접시를 씻지 않는 습관 덕분에 우연히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그는 곰팡이가 질병을 일으키는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를 죽이는 액체를 생성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곰팡이액으로부터 유효성분을 추출해보라고 몇몇 화학자를 설득했다. 그는 페니실린이 생산하기 어렵고, 쉽게 품질이 나빠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곧 포기했다. 1941년 신문들이 일제히 페니실린을 기적의 약으로 대서특필 했지만 전쟁중인 영국으로서는 생산이 여전히 문제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하던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와 생화학자 노먼 히틀리는 미국으로 날아가 미국 제약회사들이 이 약을 대량으로 생산해보자고 설득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될 무렵 미국의 공장은 연합군 부상자를 치료하기에 충분한 페니실린을 생산했다.

 

2차산업혁명이 근대 삶의 모든 측면을 바꾼다. 대량생산은 대중사회를 형성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상품이 접근할 수 있게 한다. 강철을 만드는 혁신적인 공정덕분에 배는 더 커지고, 건물은 더 높아지며, 지구를 순환하는 철도망이 구축된다. 정보는 새로 길들인 전기와 라디오파의 힘에 의해 대륙을 건너 날아간다. 사람들 역시 더 빨리 여행한다. 기차로 증기선으로 자동차로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감염질병에 맞설 효과적인 무기를 갖게 된다. 아마도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라이트형제가 성공한 최초의 비행으로 인류의 가장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리라. 산업의 확산에는 상당한 희생이 따른다. 공장노동자는 때때로 사회라는 기계의 톱니만도못한 대접을 받는다. 정통적인 공예는 사라져 간다. 미개발국가들은 서구의 진보를 위한 원자재 원천으로서 약탈 당한다. 그리고 전세계가 곧 덮쳐올 전쟁을 앞두고, 인류는 비행이라는 새로 발견한 재능을 치명적인 무기로 전환할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