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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우리 모두의 이야기(패멀라 D.

실버러시: 세계화의 여명2

1498년 향신료의 도시로 알려진 캘리컷으로서는 포르투칼 범선이 도착한다고 해서 그리 새로울 것도 없었다. 페르시아의 이슬람국가에서 면하와 커피, 장미향유를 실어날랐고, 동남아서는 향신료와 백단유, 상아를 실어날랐다. 바스쿠 다가마와 선원들에게 캘리컷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이들은 인도에 정박한 최초의 서양상선이었다. 캘리컷과 힌두스탄 왕조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중국에서 아라비아로 뻗은 사통오달 교역로의 한가운데 있었다. 1511년무렵 포르투칼은 베네치아 상인과 대상무역을 대신해 향신료와 실크의 주요 구매자로 자리를 잡았다. 1500년과 1634년사이 포르투칼에서 인도양으로 항해한 배의4분의1이상이 길을 잃었지만, 위험을 감수할 만큼 이익이 막대했다. 에스파냐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 하는 것처럼 대규모 영토를 점령하는 대신 포르투칼은 아조레스에서 마카오까지 무장요새를 잇따라 구축해 바다항로를 장악하는 교역소제국을 창안했다.

 

여러해 동안 포르투칼 상인들은 아시아에서 향신료를 사들였지만, 유럽에서는 더 커다란 상선함대룰 보유한 네덜란드인들이 유통을 장악했다. 네덜란드인은 1580년 향신료 특권을 상실하는데, 그때 에스파냐 펠리페 2세가 포르투칼을 점령했다. 포르투칼로부터 향신료를 사들일수 없게된 네덜란드와 영국의 사나포선들이 베르데 곶 제도와 아조레스, 카나리아제도 주변의 무역로에서 향신료를 실은 포르투칼의 상선들을 포획했다. 얀 하위헌 판 린스호톤은 리스본의 한 상인을 위해 일하던 네덜란드 카톨릭신도였다. 그리고 대주교 비서일을 했다. 대주교가 죽자 린스호턴은 네덜란드로 향했다. 그는 이후 포르투칼 배를 탔고, 아조래스의 한 포르투칼 상인을 위해 일했다. 마침내 1592년 네덜란드에 돌아온 린스호턴은 네덜란드인이 포르투칼의 향신료 무역 장악에 도전할 수 있는모든 정보를 갖고 있었다. 300년 후 린스호턴은 상인들을 위해 ‘ 동인도 여행기’를 썼다. 1595년 네덜란드배들이 처음으로 린스호턴의 여행기를 가지고 동쪽으로 향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1600년12월31일에 영국 동인도 회사 인가서에 서명했다.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경주가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은 소수의 전문가만이 관심을 보일 때 일찍이 튤립을 사들여서 취미로 기르고 있었다. 여관주인 바우터르 빙컬은 희귀 튤립 70종과 튤립 알뿌리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비싼 튤립품종도 여럿 있었다. 1636년 툴립열풍 때문에 세계 최초의 공황이 들이닥쳤다. 튤립 열풍 한가운데에는 네덜란드인이 있었다. 네달란드의 은과 아시아의 호화사치품 무역 덕분에 작지만 중요한 경제 강대국이 되었다. 1633년 무렵 네덜란드에서 재배되는 튤립은 500종가량 되었다. 1634년 무렵 튜립을 선물거래로 겨울에 팔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튜립시장의 불안정성을 가중시켰다. 1633년과 1635년사이 전염병이 휩쓸면서 노동력 부족이 심각했다. 그에 따라 임금이 오르면서 사람들에게 작은 사치품 정도는 즐길 여유가 생겼다. 튜립알뿌리 공급은 시장 전체에서 급증하는 수요를 따라 잡을수 없었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앗다. 하지만 얼마후 툴립시장이 붕괴했고, 세계 최초로 경제거품이 터진 것이었다. 1,2년후 튜립시장은 안정을 찾았다. 오늘날 네덜란드는 세게에서 상업적으로 생산되는 꽃의 70%를 생산하고 튜립은 여전히 가장 많이 수출되는 꽃이다.

 

1621년 앙골라 루안다, 이후 10년동안 지속될 게릴라전이 시작되었다. 독립을 위해 결단을 내린 아프리카 여왕과 노예확보가 절실한 유럽 강대국의 싸움이었다. 앙골라는 1975년 포르투칼로부터 독립했다. 에스파냐인이 라틴아메리카의 땅속에서 귀금속을 캐내는 동안 유럽의 강대국들은 신세계에서 자신이 영토를 확보하고, 다른 보물을 찾기 시작했다. 1607년 영국 정착민들이 금을 찾기 위해 제임스 타운에 왔다그러나 금은 찾지 못하고, 담배로 만족했다. 이후로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메사츄세츠에 당도했다. 1608년에는 프랑스인들이 모피사냥과 선교를 위해 식민지 수도인 퀘벡을 세웠다. 17세기초 바다를 장악한 네덜란드인들은 1624년에 지금의 뉴욕인 뉴암스테르담을 세우고, 허드슨강 계곡을 따라 뻗어 나갔다. 14년 후에 스웨덴인, 네덜란드인, 독일인 주주들이 오늘날 델라웨어의 윌밍턴이 있던 곳에 뉴스웨덴을 세웠다. 이들 모두를 기다린 것은 고된 노동과 풍부한 자원, 빈 황무지라고오해한 땅이었다. 초기 정착민은 자신을 여전히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네덜란드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유의 땅으로서의 미국의 개념도 이미 싹트고 있었다. 이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미국인으로 변모하기까지 150년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