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년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세계가 곧 끝난다고 믿었다. 유럽 곳곳에서 일어나 일식, 빗방울과 흙이 섞여 적갈색으로 내리는 혈우, 바이킹 공격이 묵시록의 징후라고 해석되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교회에서 일할 남자아이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수도원과 대성당 부속학교를 설립했다. 귀족 조차 글을 모르던 시대에 읽기와 쓰기와 간단한 산수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최고의 지적수준이었다. 상급학생들에게 7개 교양과목, 문법, 수사학, 논리학의 하위 3과목과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학의 상위4과목을 가르쳤다. 훗날 과학자 교황으로 알려진 제르베르는 유럽 최초의 에스파냐와 시칠리아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배워온 몇 안되는 학자중 한명이었다. 제르베르는 돌아오면서 아라비아 숫자와 대수학을 유럽에 소개했다. 아랍학문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접근은 무슬림의 톨레도가 기독교왕 알폰소 6세의 지배하에 들어간 1085년에야 가능했다. 알폰소의 지배하에 들어간 톨레도는 9세기의 바그다드처럼 번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13세기무렵 라틴어로 번역된 그리스, 아랍책이 옥스퍼드와 파리의 새로운 대학으로 퍼져 나갔다. 이슬람은 르네상스와 근대과학의 발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793년 100년이상 동안 성 거스버트 수도원은 배움의 성역이었다. 또한 재물의 저장고엿다. 영국 동해안의 썰물때 육지가 되는 린디스판 섬에 있는 이 수도원은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영국의 성직자 앨퀸에 따르면, 바이킹은 하느님의 사제가 흘린 피로 성 커스버트 교회를 물들이고 모든 것을 싹쓸어버렸다. 린디스판섬 공격은 바이킹 시대의 서막이었다. 8세기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노나 돛을 에용해 바다로 나가거나, 강을 것슬러 올라가 내륙까지 갈 수 있었다. 바이킹 해적은 유럽해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나 장인, 상인이었으나 봄이 되면 일부가 해적이 되어 수도원을 약탈하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잡아갔다. 영국 제도의 부유한 수도원은 좋은 먹잇감 이었다. 830년대로 접어들면서 바이킹 약탈 양태가 바뀌었다. 고립된 수도원보다 대규모 탐험대를 조직하여 기지를 구축하고 방어공사를 했다. 다음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사용할 의도였다.
진지는 촌락까지 확대 되었다. 침입자는 지역의 왕과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점점 노르만족과 러시아인으로 변모해 갔다. 노르웨이 바이킹족은 아일랜드의 조용한 동쪽 해안에 더블린을 시작으로 항구마을을 세웠다.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항구마을 낭트를 약탈하고, 850년대는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지금의 남부 스웨덴과 덴마크 지역에 거주했던 바이킹족인 데인족은 잉글랜드를 집중적으로 약탈했다. 스웨덴인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처음 발트해에서는 교역과 거래를 구실로 접근했다가 후에는 러시아에서 정복자로 군림했다. 858년 류리크는 새로운 나라 러시아를 세우고, 키예프를 수도로 정했다. 현재 러시아인의 선조인 류리크의 바이킹은 비잔티움과의 교역로로 드네프르강을 이용했다.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갈수 있는 통로였다. 볼가는 이들이 모피와 노예를 팔고, 중국 비단을 사들이면서 동서 무역망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제국 서쪽 반은 제국이 몰락후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로마제국 동쪽은 15세기중반까지 계속되었다. 5세기 제노황제 치하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이슬람 세력이 처음 팽창하기 시작한 이래 8세기를 기점으로 콘스탄티노플은 끊임없이 시달렸다. 14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오스만튀르크를 막아내지 못해 1362년 오스만 제국은 동로마 제국 대부분을 정복했고 콘스탄티노플은 도시국가로 축소 되었다. 1095년 11월27일 프랑스,독일,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클레르몽 성당에 모여들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선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튀르크족이 비잔티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기독교의 성지가 이교도에 의해 망가졌다. 교황은 동료 기독교인의 피를 그만 흘리게 성지를 튀르크족의 손으로부터 탈환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인의 사명이라는 말로 설명을 끝마쳤다. 이로써 십자군전쟁이 시작되었다.
637년 무슬림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나서도 무슬림과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평화롭게 잘 지냈다. 785년말 게르만 왕국사이에서 기독교가 거의 퍼져 나가지 못하자, 샤를마뉴는 세례를 거부하는 색슨족에게 사형을 내렸다. 동쪽 슬라브족들은 훨씬 나중에 개종햇다. 변방의 이교도에게 1095년 기독교왕국은 로마카톨릭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수장인 교항 우르바누스 2세는 전임자들보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원했다. 로마가 멸망하고 난 후 유럽은 점점 더 번창했다.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상설시장이 생겼고, 어떤 사람은 농노에서 수공업자가 되었다. 도시에서 소수의 중간계급이 형성되었다. 부유하고 신앙심 깊은 유럽인들이 돈을 손에 들고, 순례를 하기 시작했다. 순례자들은 종교적 경험과 이슬람 보물을 갖고 돌아왔다. 대규모 순례여행이 확산될 즈음 근동 권력판도가 변했다. 1071년 셀주크 튀르크족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 셀주크인은 이전의 이슬람 통치자들보다 다른 종교에 덜 관대했다.
유럽에서 귀족중에 토지가 없는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가질수 있는 직업을 가질수 있는 곳은 교회와 전쟁터뿐이었다. 동쪽에서의 전운은 미래가 불안한 젊은이에게 영광과 약탈품과 토지를 획득할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1096년 봄 동쪽으로 향한 첫 십자군은 군인이 아니라, 민중 십자군으로 알려진 거지, 부랑배 등의 빈민집단이었다. 우슬림군은 산적 소탕하듯 싹 쓸어버렸다. 두 번째 십자군은 달랐다. 잘 훈련받은 직업군 지휘관이 이끄는 기사와 궁수가 1097년 여름 팔레스타인에 도착했다. 십자군은 거침 없이 진격해서 199년 6월초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의 무슬림은 사실상 생존자가 전무할 정도 였다. 유대인은 신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으며 유대교 회당에 숨었다. 십자군은 회당의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다.
200년 동안 십자군은 전쟁을 하려고 동쪽으로 갔고, 그곳의 전리품으로 호주머니로 채웠다. 십자군 전쟁은 무슬림 세계보다 유럽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슬림의 성곽을 경험한 유럽인들은 성 쌓는 방법을 바꾸었고, 이슬람의 의료체계를 중세의 손님접대용 숙소에 적용해 병원을 발전시켰다. 십자군에게 교통편을 제공했던 베네치아 상인들은 무슬림 도시에 작은 마을 세우고, 동서무역로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유럽의 기독교 정복자와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방어자간에 벌어진 충돌은 피보다 더한 것을 퍼뜨렸다. 십자군을 통해 유럽은 다른 세상과 접촉하게 되었다. 중세 동양과의 군사적, 상업적, 문화적 접촉으로 서양은 영원히 변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고 숨고를 틈도 없이 낯선 정복자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출현했다. 유라시아를 건너 문화의 중심지를 덮치기 시작한 몽골전사들 때문에, 종교와 학문은 무력에 자리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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