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의 역사가들은 166년 중국을 방문한 로마의 공식사절단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사실 중국을 방문한 최초의 로마인은 비단과 동양의 희귀품을 수입하여 이윤을 얻으러온 상인이었다. 중국과 서양사이에 다양한 실크로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카슈미르와 북인도로 가는 길이 있었고, 코카서스산악지대를 거쳐 가는 길, 이란의 고원이나 시리아 사막을 거쳐 지중해로 가는 길도 있었지만, 수사에서 사르데냐에 이르는 다리우스왕의 도로가 아나톨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길이 주역로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인과 그들의 후손인 사산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왕국은 중국과 서양의 직접무역을 방해했다. 파르티아군은 자신들의 조상 페르시아처럼 대부분 기병으로 구성 되었다. 중세와 비슷한 갑옷을 입은 중기병이었는데, 주력은 궁경기병이었다. 궁기병은 적진으로 빠르게 파고들어가 화살을 쏘고 퇴각하는 전법으로 유명했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기술력과 동서양 민족국가간의 탄탄한 무역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생존시 세계를 지배했던 두 제국이 힘을 잃게 되었을 때, 서양문명은 예수의 시련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고 훨씬 후에는 열광적인 신앙의 힘이 세속 왕의 권력을 능가하였다. 예수의 일생을 잘 알 수 있는 곳은 기독교 복음서뿐이다. 예수의 삶은 헤롯왕 치하의 유대에서 시작한다. 헤롯왕은 유대 마카비왕조의 마지막 왕을 몰어내고, 로마의 인정을 받아 기원전 37년 왕위에 올랐다. 로마제국의 시민이면 모두 세금을 내야 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법령으로부터 예수의 십자가형까지 로마는 예수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동력이다. 그 당시 예수에게 선고된 십자가형은 범죄인과 정치적 반역자와 노예를 처형하는 로마식 방법이었다.
성경에는 구경꾼들 사이에서 쓰러진 예수가 다시 일어서려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유대 청년의 이름은 키레네의 시몬이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예수에게는 뒤따르는 두 여자가 있었다. 예수의 몸이 너무 약해서 더는 혼자서 걸을수가 없다고 판단한 로마병사가 시몬에게 대신하여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명령한다. 시몬은 두려웠지만 쓰러진 예수를 일으켜 세우고 거대한 나무십자가를 짊어진다. 골고다에 도착 하자 로마병사는 예수의 옷을 벗기고, 그들이 짊어지고 온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는다. 십자가를 세우기전에 예수의 이마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시를 새긴다. 시몬은 슬픔에 젖어 오열하며 예수와 함께 올라갔던 갈보리 산을 내려온다. 유대교가 복음신앙이었던 초기에 기독교는 또다른 종교분파에 지나지 않앗다. 이 새로운 분파는 처음 에는 중동과 지중해의 유대공동체 사이에 퍼져 나갔다. 그러다가 60년 무렵 사도 바울이 유대의 뿌리에서 떨어져 나와 로마제국의 그리스 도시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다. 1세기 중반에는 로마내에 기독교 공동체가 확산되고 있었다.
기독교 교리는 원래 여자, 노예, 도시빈민 등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호소했지만, 200년 무렵에는 부자들도 끌어들이면서 공식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로마인은 다신교를 인정한 다문화 민족이었다. 기독교인은 국가의 제의를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며, 황제를 숭상하는 제의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분명 국가에 대한 반역이었다. 공식적인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말기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점차 소멸했다. 기원후 영국, 갈리아, 에스파냐 지배자로 군림하던 미래의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 지배를 위해 정적 막센티우스와 대결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십자가를 새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와 동로마제국 리키니우스는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밀라노칙령을 발표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죽을 때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팍스로마나는 오래가지 않았다. 235년에서 284년 사이에 26명의 통치자와 40명의 왕위 찬탈자가 로마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군만이 안정된 권력으로 남아 있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계속 되었지만, 초기 한나라 황제들이 누렸던 절대권력은 얻지 못했다.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하고 환관에 의해 궁중 음모가 판치고 외척이 황제를 좌지우지 했다. 220년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고 세개의 독립국가가 공존하는 삼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권력구조가 소용돌이에 휘말릴 때도 실크로드는 열려있었다. 13세기 실크로드무역은 몽골제국의 칭기스칸이 중국, 중앙아시아, 중동, 서유럽 일부를 정복했을 무렵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민중은 힘을 얻었지만, 그 힘은 민주주의의 만개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수의 힘 있는 자들이 절대권력을 행사하면서 육지로 바다로 전쟁이 확산되었다. 이념과 신앙을 지키고자 죽음도 불사했던 이 시기는 또한 역사적으로 급변하는 시대였다. 철기시대에 발생한 분열과 갈등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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