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게 불가능할 만큼 노쇠해졌을 때 취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래도 요양원은 필요하다. 요양원의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남아있는 것이 가족이다. 그러나 수명이 늘어남과 동시에 맞벌이 수입에 기댄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는게 문제다. 그 결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고통과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루 할아버지는 여든여덟살이 되던 해에 아주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했다. 루 할아버지는 일흔여섯살에 혼자가 되었다. 그동안 할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어가는 아내를 돌보면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아내의 죽음이 슬프기는 했지만, 점점 혼자 사는 일에 익해 익숙해졌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신문을 읽은 다음 산책을 하고, 슈퍼마켓에서 그날 필요한 장을 본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들어 먹고 오후에마을도서관을 간다. 도서관에서 신문과 잡지를 읽으며 소설책을 빌려오기도 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에 두번쯤은 이웃과 함께 카드게임을 즐긴다. 여든다섯살에 심장마비을 일으켜 스텐트 삽입수술을 했다. 그리고 3년후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으면서 증상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 여든여덟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상태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루 할아버지는 여전히 운전을 하고 카드게임을 했다. 집안 일과 돈문제도 직접 관리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넘어지고 난 후 그 동안 축적되어 온 변화의 무게가 느껴졌다.
루 할아버지는 더 이상 혼자 생활할 수 없었다. 남아있는 유일한 방법은 딸네 가족이 사는 집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루 할아버지는 부모와 자녀의 역할이 바뀌었는 데도 자신이 가장이 아니라는 걸 마땅치 않아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활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외로워졌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루 할아버지는 서서히 적응해 갔다. 집에 있는 베이징이라는 개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루 할아버지는 안정을 찾았고, 자기여생을 이렇게 보내게 될거라 상상했다. 그러나 딸은 갈수록 힘들어지기만 했다. 루 할아버지는 1년 사이 4번이나 구급차로 실려갔다. 의사들이 해줄 수 있는 일리라곤 딸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좀 더 주의를 기울이라고 조언해 주는 것 뿐이었다. 그녀는 간병인을 고용해 목욕을 비롯해 기타 필요한 일들을 돕도록 했다. 루 할아버지는 전립선에 문제가 있어 비뇨기과 약을 먹고 있었지만, 소변이 샜고 제때 화장실까지 못가는 일들이 벌어졌다. 1회용 속옷을 입도록 권유했지만, 루 할아버지는 거절했다. 또한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TV를 볼 때면 소리를 크게 해놓기 일쑤였다.
오늘날과 같이 의료화 된 시대에 장애가 있고, 노쇠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기술적인 면에서나 일상생활면에서나 엄청난 임무다. 루 할아버지 상황이 악화되어 갔지만, 딸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노인을 돌보는 사람의 부담은 100년전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그녀는 정서적으로 힘들고 지쳐갔다. 가족과 1박2일 여행만 가려 해도 사람을 구해서 아버지와 함께 있게 해야 했다. 그래도 항상 문제가 발생했다. 딸은 자신이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좋은 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가 안전하고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자기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기도 했다. 사촌이 루 할아버지 상태를 평가하고 간호사를 추천해 주었다. 딸이 악역을 맡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간호사는 루 할아버지가 받아야 하는 도움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그래서 이제 집에서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지내면 안된다는 말도 텃붙였다. 루 할아버지는 딸이 일을 그만두고, 곁에서 있기를 바랬다. 딸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채 아버지를 충분히 잘 돌보는게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쇠약해지면 행복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만 같았다. 그들은 요양원이 아닌 어시스티드 리빙 시설을 찾았다. 어시스티드 리빙은 독립주거시설과 요양원의 중간단계 정도로 간주된다. '어시스티드 리빙' 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들 중 하나인 케런 브라운 윌슨의 생각은 달랐다. 윌슨은 루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아무리 신체적 제약을 많이 받는 상황에서도 자유와 자율성을 잃지 않고, 살 수 있을 곳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늙고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 같은 생활을 견뎌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윌슨은 쇠약한 노인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돌보는 대신, 노인들이 그들을 보살피는 일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주도권을 유지하게끔 해줄 수 있는 대안을 하나하나 적어 나가 보기로 결심했다. 마음속에 계속 떠오르는 단어는 집이었다. 집이야 말로 개인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존중되는 곳이다. 집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공간을 어떻게 나눌지 가재도구를 어떻게 관리할지 마음대로 정할수 있다. 집을 떠나면 그럴 수 없다. 이런 자유의 상실이야말로 노인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다. 윌슨부부의 노인을 위한 생활지원 주택이 1983년 문을 열었다. 파크 플레이스라는 곳이다. 파크플레이스는 과감할 뿐 아니라, 정말 매력적인 개념의 주거시설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환자라고 불리지 않았다. 모두가 거주민일 뿐이었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모두 욕조와 샤워를 완비한 욕실, 잠글수 있는 현관을 갖춘 개인아파트에서 살았다. 반려동물 키우는 것이 허용되었고, 카펫, 가구 등을 직접 고를 수 있었다. 실내 온도를 몇도에 맞출 것인지, 뭘 먹을 것인지 등을 스스로 정할 수 있었고, 누가 언제 자기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윌슨은 모두 그냥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고령에 따른 장애를 겪고 있는 노인들은 가족을 불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단지 내에는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었고, 밤낮 아무 때고 급히 도움이 필요할 때는 누를수 있는 버튼도 있었다.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도움도 제공 되었다. 말벗을 찾고, 외부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각자 가장 소중히 여기는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물론 파크플레이스 서비스는 대부분 요양원에서 제공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서비스를 베공하는 사람들이 항상 타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게 달랐다. 주민들은 자신의 일과 규칙을 스스로 정했고,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말 것인지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한편 정신이 흐려져서 더 이상 이성적인 결정을 하지 못할 시점에 이르면, 가족 혹은 미리 지정해 놓은 대리인이 나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요인과 선택의 범주를 다시 협의할 수 있었다.
어시티드 리빙이라고 알려진 윌슨의 개념은 아무도 '보호시설에 감금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자는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 개념은 즉시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노인들이란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온 사람들이 이 시스템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윌슨과 직원들은 주민의 안전을 보장할 방법을 만들어 낼 책임을 짊어졌다. 동시에 그녀는 주민들이 자기집에 사는 사람만이 누릴수 있는 자율성과 사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철학도 지켜야 했다. 그 자율성은 안전이나 운영팀의 편의를 이유로 부과된 규칙을 거부할 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국은 윌슨 부부에게 주민들의 건강, 인지능력, 신체기능, 그리고 삶에 대한 만족도를 계속 추적 조사하라고 요구했다. 1988년 주민들이 자유를 위해 건강을 희생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발표했다. 게다가 신체기능과 인지능력은 오히려 향상 되었고, 심각한 우울증의 발생 건수는 감소했다. 정부는 보조비용도 요양원보다 20% 절감할 수 있었다. 윌슨의 프로그램은 완전히 성공을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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