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죽는다고 해도 내가 할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고, 원하는 것을 다 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버린 시대에 큰 의미를 남긴다. 할머니의 아파트에 독립 주거공간 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했지만, 이전까지 한번도 당해보지 않은 규칙과 간섭을 피할 수는 없었다. 도우미들이 할머니의 식단을 살폈고, 간호사들이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할머니가 균형을 잘잡지 못하는 것을 보고 보행 보조기를 사용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이 가족들에게는 안심되는 일이지만, 할머니 자신은 아이처럼 사사건건 간섭당하는 것이 싫었다. 앨리스 할머니는 자신이야말로 이억만리 낯선 땅으로 건너가 다시는 그것을 떠날수 없는 운명에 처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할머니는 누군가가 자신을 돌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가 원한 건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현대의 양로원과 요양원은 노쇠하고 병약한 사람들이 구빈원처럼 끔찍하고 음울한 곳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해 주겠다는 욕구에서 나온 게 아니다. 열악한 시설을 둘러보고 이런 말을 한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 알다시피 살다보면 꼭 이런 시기가 오잖아. 혼자 힘으로 문제를 헤쳐나갈 수 없을 때 말이야. 그러니 우리가 그걸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보다 이렇게 말했다는게 옳다. ‘사람들을 보니 의학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이런 사람들을 병원에 수용하는 것은 어떨까? 의사들이 뭔가를 알아낼 수도 있잖아’. 현대의 요양원은 거기서부터 시작돼 발달한 것이었다. 거의 우연히 말이다. 위대한 의사이자 작가인 루이스 토머스는 1937년 보스턴 시티 병원에서 인턴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뭔가 달라진게 있다면 그것은 주로 온기, 안전한 보호, 음식, 친절한 보살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제공하는 간호사들의 능력 덕분에 생겨난 변화일 것이다. 의학은 전혀 혹은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2차대전 이후 항생제가 나와 감염성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이식수술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의사들은 영웅이 되었고 병원은 질병과 절망의 상징에서 희망과 치료의 장소로 변했다.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이후 대부분 기간동안 육체적 고통은 근본적으로 혼자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주로 자연과 운명, 그리고 가족과 종교의 보살핌에 기댔다. 의술은 그 외에 시도해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 종교적인 치유 의식이나 집안에 전해내려 오는 민간요법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의학이 더욱 강력해지면서 현대식 병원은 완전히 다른 개념을 도입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나를 치료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된 것이다. 이제 병원은 노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몸에 문제가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찾는 곳이 되었다. 연금 덕분에 노인들이 은퇴후 가능한 한 오래 독립적인 생활을 누릴수 있게 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연금제도에는 언젠가 죽게되어 있는 생명의 마지막 단계, 즉 노쇠해지고 허약해지는 국면에 대한 고려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병원들이 많이 생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쇠약해진 노인들이 들어가기에 상대적으로 매력있는 시설로 자리 잡은 것이다. 병원을 찾는 사람 수가 증가함에 따라 병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병원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회복하는 데 오랜시간을 걸리는 환자들을 별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들을 지을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다. 이것이 현대요양원의 시초였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 때문에 nursing home, 즉 요양원이라 이름이 붙은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요양원의 핵심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우리 중 절반이상은 대체로 1년내지 그 이상의 시간을 요양원에서 보내게 될텐데, 사실 이곳은 진정 우리를 위해 만들어진게 아니라는 점 말이다. 요양원에서 사는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어버렸다. 병원환자복을 입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주면 하고, 약을 먹으라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주는 아무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명 거쳐갔다. 모두 인지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군대훈련소, 고아원, 정신병원과 함께 감옥과 요양원이 사회전반과 대체로 단절된 ‘전체적 기관’의 전형이라고 규정했다. ‘ 개인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각기 다른 권력당국 아래에서 모든 걸 아우르는 합리적 계획없이 잠자고, 놀고, 일하려는 경향이 있다는게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사회적 합의이다. ’ 반면 전체적 기관은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을 나누는 장벽을 허물어 버리는데 그는 그 방식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같은 장소, 같은 중앙권력아래서 실시하도록 한다. 구성원들이 각각의 일상적 활동을 다수의 타인들이 바로 옆에 있는 상태에서 행하게끔 한다. 모두 같은 대우를 받고, 같은 일을 함께 하도록 요구 받는다. 일상의 모든 활동은 엄격한 시간표에 따라 진행된다’. 요양원의 공식목적은 간호와 보살핌이다. 그러니 이 기관에서 진화한 보살핌이라는 개념을 앨리스 할머니가 보통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너무 거리가 멀어서 견디기 어려웠다. 문제는 그녀가 원하는 삶이 단순히 안전하다는 것 이상이라는 데 있었다. ‘전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잡이 아니라 병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사실 이는 모든 요양원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현실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삶에서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느꼈다. ‘나는 도움외 되고, 내 역할을 다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녀가 말했다.
할머니는 예전에 자기 장신구를 직접 만들고, 도서관에서 자원봉사 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녀가 하는 것이라고는 빙고게임, DVD영화시청, 그리고 기타 수동적인 단체할동들 뿐이었다. 할머니는 친구, 사생활, 그리고 삶의 목표같은 것들이 가장 그립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우선 순위와 가치를 놓고, 갈등이 벌어진다. 할머니처럼 시간표에 따라 활동하거나, 약을 먹는 것을 거부하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저항한다. 요양원 직원들은 그런 노인을 두고, 성깔 있다고 표현한다. 나쁜 요양원에서는 다툼이 심해지면 환자를 노인용 의자에 묶어 놓거나, 자물쇠를 채워놓기도 하고, 향정신성 약물을 투여해 화학적으로 진정 시키기도 한다. 어떤 요양원이든 노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건 고사하고, 그들 옆에 앉아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조차 없다. 이것이 바로 삶의 마지막 단계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로 일관하는 사회가 낳은 결과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시설과 제도들은 여러가지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병원 입원실을 비우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고, 노년층의 빈곤을 극복하려는 목적 말이다. 그러나 그 시설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듯하다. 우리가 병들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를 돌볼수 없게 되었을 때도 삶을 가치있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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