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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중년을 말하다.(The Survival Papers)

성장을 위하여

융은 남자는 성장하기 위해서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배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장하기 위해서 그는 어머니를 잊고 그의 삶에서 첫번째 사랑을 포기하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산은 항상 너를 추락시킬 기회를 찾고 있다. 쉽게 산을 넘을 수 있을거라 기대해서는 안된다. 

 

절름발이가 된다는 것은 평소처럼 제대로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중년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상징이다. 망가진 정신을 가진 사람은 일종의 절름발이다. 사람들은 무릎으로 기어 정신분석을 받으러 온다, 우월 기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람은 절뚝거린다.

 

적극적 명상은 그림이나, 음악, 춤이나 진흙 공작 등 하고 싶은 어떤 작업으로도 할 수 있다. 적극적 명상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작업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를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작업에 대해서는 훈련 받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훈련 받은 마음은 자유로운 표현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적극적 명상은 무의식이 안에서 폭발하지 않도록 출구를 만들어 주는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대신, 우리는 적극적으로 명상함으로써 감정을 자신 안에 담을 수 있다.  글쓰기는 또 다른 방식의 적극적 명상이다.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우리는 마음 속에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의인화 시켜 그 인물과 대화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대화를 적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속의 이미지를 현실 속의 인물처럼 구체화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명상과 백일몽의 차이이다. 만약 우리가 내면의 이미지를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존재로 현실화해 내지 못한다면 적극적 명상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신들과 신성한 영웅들은 어렸을 때 부모나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제우스, 니오니 소스, 포세이돈, 모세, 로물루스와 레무스 등은 어려서부터 버려졌다. 버려진 아이라는 모티브는 신화 속에 자주 등장한다.  융에 따르면 신화 속의 아이들은 높은 의식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높은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버림 받는 것이 아니라, 높은 의식을 성취하기 위해 버림받는다. 다시말해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높은 의식을 갖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이다. 독립하기 위해서 남자는 그의 근원인 어머니, 가족,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순조롭게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순조롭지 못할 때, 그 결과는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가 과거의 상태에 매달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래로 앞서 달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창조적 본성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 새로운 가능성에 몰입한다. 중년의 위기에서 흔히 나타나는 갈등은 과거의 의존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열광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은 성장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중년에는 이러한 갈등을 견뎌내야만하다. 이러한 갈등은 외로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을 중년의 위기로 몰고가는 환경들은 해변의 모래처럼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환경들이 한결같이 독특하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환경들은 모래 알갱이처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런 환경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개인적 심리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처지에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차이의 밑바닥에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고 따라했던 보편적인 사고와 행동패턴들이 있다. 

 

물론 정신분석에서 지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머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치유는 감정에 바탕을 둔 경험적인 자각에서 비릇된다. 경험에서 비릇된 생각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에는 신성한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은 자신에 대한 균형잡힌 시점을 갖게 만든다. 나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나는 전적으로 선하지도 않지만 전적으로 나쁘지도 않다.  내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통합된 인격을 갖게 된다. 융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제3의 가능성이 발견될 때까지, 양극단 사이에서 갈등을 견디는 일이다. 논리학에서는 양극단 사이에 있는 제3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선이면서 악일 수는 없고 희면서 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석 과정에서는 논리학에서 부정하는 제 3의 가능성이 부각된다. 이 제3의 가능성이 바로 초월적 기능이다. 초월적 기능은 우리에게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변화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비록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