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질병은 인간과 환경이 만나는 지점에 그 성격이 달려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병이 걸리는 데는 대체로 환경적인 원인이 있다. 병의 원인과 경과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질병은 우리와 환경 사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질병은 우리와 환경사이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말해주는 경보기인 셈이다. 서로 다른 건강수준은 사람들이 처해 있는 서로 다른 사회적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욱 중요하고 흥미로운 점은 질병이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회적, 감성적 행복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요인에는 초기 아동기에 겼었던 경험, 현재 겪는 불안과 걱정의 강도, 사회적 관계의 질, 삶에 대한 자기 통제력의 정도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포함되어 있다.
선진국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생활수준이 개선되면서 물질적 궁핍의 직접적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이 건강상태를 결정하는 요소들로 점차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건강에 관한 기록을 보면, 소득의 증가와 절대빈곤의 감소가 건강에 미친 효과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질병구조의 변화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는 모든 연령대, 특히 아이들을 공격했던 고질적인 감염성 질환들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3세계에서 빈곤의 질병으로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다. 반면 이제 인간의 주요 사망의 원인은 심혈관 질환이나 암과 같은 퇴행성 질환으로 옮겨졌다. 건강을 위한 물질적 필수요건들이 충족되고 나면, 1인당 GNP 대비 평균 기대수명 곡선의 상승세는 안정 국면으로 접어든다. 어느 지역의 시민이 다른 지역의 시민보다 두배 잘 산다고 해도, 이런 차이가 평균수명의 차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몇세기 전만 해도 잘먹고 잘사는 부자들이 뚱뚱하고, 먹을 양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말랐었다. 하지만 질병구조가 변하면서 이런 양상이 역전되었고, 지금은 가난한 사람이 더 뚱뚱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 중반이후 임금과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되고, 다양한 복지제도와 사회안전망이 보완되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절대적 궁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부유한 국가에서 질병구조가 변화하고 비만과 심장병이 하위 계층에서 더 많이 발병함에 따라, 빈곤도 절대적 개념보다는 상대적 개념으로 다시 정의되기 시작했다. 홍수가 잦아들면 상처입은 대지가 그 모습을 드러내듯이, 건강에 미치는 물질적 궁핍의 효과가 잦아들자 심리적 요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절대적 빈곤이 그 자체로 극심한 심리적 걱정과 불안을 낳듯이 물질적 박탈과 심리적 스트레슨느 서로 밀집한 관계에 있다. 식료품처럼 꼭 필요한 재화가 줄어들면 심리적 효과나 사회적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스트레스는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다 신체를 병원균에 취약하게 만들어 건강을 우회적 으로 악화시킨다. 심리사회적 요인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력은 흡연, 음주, 약물남용, 스트레스성 폭식처럼 건강에 안좋은 생활습관이 더 자주 발견되고, 퇴행성 질환이 일찍 발생하는 선진국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현대인들은 육체적 질병이나 수명단축과 같은 물리적 고통만이 아니라, 다양한 심리적 아픔과 고통도 함께 겪고 있다. 무엇이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주는지를 알아내려면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사회적 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한 개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우연하게 결정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천명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질병구조를 연구한 결과 사람들의 심리사회적 행복과 사회의 구조적인 특성들이 서로 연관되는 여러 보편적인 유형이 도출되었다.
최근들어 계급간 건강수준과 기대수명의 격차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한 사회에서 건강수준은 보통 사회계층이 높을수록 좋아진다. 미국에서 부유한 지역의 백인과 가난한 지역의 흑인 사이에 존재하는 기대수명의 격차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서 약 16년 정도로 추정되었다. 만약 이 수치가 16세 아동들의 기대수명이 아니라 출생 당시 영아들의 기대수명으로 조정되고, 따라서 영아와 아동의 사망률까지 합산 되었다면, 그 격차는 더 벌어졌을 것이다. 전체 사회계층을 통틀어서 사회적 지위와 사망률은 연관관계를 보인다, 어떤 곳에서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오래 사는 경향이 있다. 심장병만이 아니라, 사망원인까지 포함해서 조사했을 때도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말단 공무원의 사망률은 고급 공무원보다 세배나 높았다. 이처럼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사무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그들 내부의 서열에 따라 이렇게 건강불평등이 발생하고 있다.
건강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핵심은 건강 격차의 정도가 각 사회와 시대 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국가나 시대마다 건강불평등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이런 격차가 고정되어 있거나,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다시말해 어느 정도 인위적으로 건강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기대수명의 격차는 그 원인이 무엇이든 결국 근대시장 민주주의의 병폐라고 할수 있는 사회적 불의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서 쉽개 분개한다. 하지만 건강불평등이 이보다 훨씬 더많은 희생자를 낳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건강불평등을 매년 정부가 자의적으로 상당수의 국민을 사형시키는 수준과 같은 수준의 인권침해로 취급할 필요가 있다. 하층민 일수록 빨리 죽는다는 사실은 사회적 불의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건강 불평등이 가지는 또 다른 불의는 가난한 사람들은 오래살지 못할 뿐아니라, 사는 동안에도 가난하게 산다는 점이다. 건강불평등은 사회정의의 기본적인 주제일뿐 아니라, 전체 인구의 건강수준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밝혀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건강불평등의 원인을 파악하면, 다른 사회문제들의 주요 원인이 무엇인지도 어느정도 알수 있게 된다. 상대적 박탈감과 낮은 사회적 지위는 건강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문제들도 함께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들의 원인만이 아니라, 사회문제들이 만들어지는 심리사회적 경로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불안정, 불안, 그리고 만성 스트레스는 심혈관계와 면역체계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사람을 빨리 늙게 하며 질병을 견뎌내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렇듯 건강을 약화시키는 심리사회적 요인들은 폭력, 약물 오남용, 우울증, 10대 임신, 그리고 학령기 아동들의 낮은 학업 성취도와 같은 다른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사회구조와 사회관계의 질은 물질적 기반위에 형성된다. 특히 이 책에서는 상대적 소득 불평등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인간의 사회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 전체의 소득수준과 재산의 절대적 수준이 문제이지, 상대적 불평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회문제의 근원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삶의 질과 행복을 높이기 위해 인류가 발전시켜야할 사회의 특성과 인간의 사회성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고민할 수 있다. 불평등이 사회하층에 있는 사람들 뿐아니라, 전체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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