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고 싶으나 너무 힘들어 지레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산은 이제 노인에게 반反자아다. 뛰어들어 마음껏 헤엄치고 싶은 물은 특정 온도가 되어야만 견딜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산에 오르고,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며, 계곡을 거닌다. 노인은 내쫓긴 것만 같은 우울함을 맛보며, 그저 자신에게 되돌려진 채 외로울 뿐이다. 이제 자연은 그에게 전혀 낯선 것으로 소외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부정하게 된 세계가 어디 한번 도전해보라고 을러대는 것이 항상 굴욕적이지만은 않은 공간, 곧 자신의 방으로 후퇴했다. 건장한 노인은 여전히 세계와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려 흥을 붇돋운다. 이러한 노인은 덜 병들었을 따름이다. 객관성을 중시하는 의학과 과학까지 고려할 때, 늙어가는 사람에게 세상이 등을 돌린다는 우리의 말은 진실이다. 몇몇 건장한 노인을 들먹이는 지당한 논리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는 늙어가는 사람의 적이 된다. 빠르든 늦든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몸의 노쇠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늙어가는 사람은 세계와 겨루는 불평등한 싸움을 포기하고 침잠한다.
적대적으로 변한 세상에 완전히 패배한 날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죽음처럼 확실하게. 늙어감의 기본상태라는 게 있다면 이 상태는 '비참함'과 '불행함'이라는 단어로 어느 정도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으리라. 비참하다는 말은 어떤 고통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의식가 가져다 주는 답답함이다. 그리고 불행함이란 그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실존의 공간을 채우려는 어떤 확신이다. 곧 생생한 아픔을 주는 병을 의학이라는 견지에서 회복하기는 했지만, 살아가는 형편이 예전보다 훨씬 더 골골해졌다는 떨치기 힘든 확신이 우리를 사로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게 '나'이어야 해? 늙어가면서 늙음을 통해 아픈 사람은 거울을 보거나, 걷거나, 달리거나, 산을 오르며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거듭 세상이 자신을 거부하는 적이 되어버렸음을, 자기 자신을 떠 받들고 있던 몸이 자신에게 부담을 주며, 그 자체로 짐인 몸통이 되었음을 경험한다. 몸이 세계를 금지 시키는, 그래서 심술궂을 정도로 몸에 집착하도록 강제하는 그 늙음 탓에, 사람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몸'이 되고 만다.
거역할 수 없이 죽어가는 껍데기가 되고 만다. 이 껍데기를 뒤집어 쓴 늙어가는 사람은 이 껍데기를 자신과는 상관없는 외부라고 느낀다. 노화 과정에서 자아분열의 첫단계는 정신적 자아가 껍데기를 벗어버리기를 원하는 단계다. 이때 정신적 자아란 그저 모아진 시간이며, 이 시간의 기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자아를 말한다. 노화 과정은 물질화와 실체화의 과정이다. 갈수록 나빠져가는 신진대사는 생리작용 전체를 망가뜨리고, 외적으로 알아볼 수 있으며, 주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찌꺼기가 되어버리는 상황을 빚어낸다. 노화 과정에서 몸은 갈수록 질량이 되며, 갈수록 에너지를 잃는다고 말할 수 도 있다.
나는 나의 모든 살아있는 세포다. 그러나 이 모든 세포는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탓에 동시에 내가 아니다.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라는 이런 생각은 하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나는 내가 갈수록 낯설어진다. 나의 세포에 더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래서 나자신의 실체를 보면 볼수록, 나는 낯설기만 하다. 나는 몸을 통해 늙어가면서 몸을 적대시 하는 '나'다. 젊었던 시절 나는 몸을 등한시 하면서도 몸과 더불어 '나'였다. 노화라는 단계를 거치면서 노인의 군단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오로지 몸으로 남을 뿐,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몸은 갈수록 에너지를 잃어가며 질량이 되어버려 결국, 나는 더는 나일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인간인가? 그럼 뭐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가?
절박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해도 빈곤은 수치이며, 몸의 쇠락 역시 부끄러운 일일 따름이다. 세계, 여기서 사회라는 복합체를 뜻하는 세계는, 그 시퍼런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의 처지를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고, 남자다운 강함이나 여성스러운 인내의 손짓으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 별것 아니야' 하는 식으로 아픔을 무시하는 용감한 이들은 몰락이라는 가슴 아프게 만드는 연기로, 쓰라림을 맛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회로부터 명예를 선물을 받기는 하리라. 그러나 자신의 아픔을 부정하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아 발견에 이르지 못하리라. 몸은 생생한 아픔 그대로이며, 더는 세계와 공간으로 나아가 그 안에서어찌할 수 없다. 몸은 있는 그대로의 '나'인 동시에 늙어가는 사람이 자신 안에 켜켜이 쌓아놓은 시간 바로 그것이다.
아무런 아픔 없이 잠들고, 내일이면 다시 세상에 속해 그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는 추상적인 자아는 치통이라는 아픔으로도 사라지고 만다. 아픔과 질병은 몸이 쇠락하며 벌이는 축제이다. 몸은 자신과 나에게 이 축제를 베풂으로써 '나'라는 자아는 이 축제에서 오롯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픔이라는 짐을 떨쳐버리면 신체의 손상, 그 신호가 치통이었던 신체손상으로 다시금 자기소외의 감정이 들어선다. 도대체 나는 무엇이 되어버렸는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기는 했으나, 이내 다른 더 나쁜 아픔이 틀림없이 찾아올 것임을 알면서도 잠에 빠지는 나는 여전히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구나 건강하고 싶지 병들고 싶지는 않다. 젊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늙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치과 의사의 손을 두려워하며, 초현실주의 조각처럼 보이는 인공치아는 더더욱 두려워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치통을 앓으며, 일종의 새로운 방식으로 바로 그 자신이 되었다는 것 역시, 우리에게는 확실함이다. 몸은 자신의 것인 동시에 세계의 것이다. 그래서 사회와 그 구성원은 각자 자신의 몸을 충실히 지켜야 사회가 보존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픔은 사회를 위한 것이어야 마땅할 몸이,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자신의 것임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세계로부터 빠져 나왔다. 늙어가는 사람이 자신 안에 담고 있으며, 기억을 통해 살아낸 시간인 '정신적 자아'는 그래도 우리 존재를 바라보는 이웃의 반응을 무시할 수 없다.
관계에서 좌표가 되는 친구를 잃어버린 상실감은 결정적이다. 병에 시달리는 노인의 자기 소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소외는 몸의 통증과 물질화로 이룩한 자아 발견보다 더 끈질길 뿐만 아니라, 보다 더 결정적이다. 현실적이라고 할까. 현실이라고 하는 것도 관계를 통해 빚어진 것이며,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사회에서 관계할 힘을 잃어버린 소외이다. 관계의 변화는 몸보다 타인에 의해일어난다. 아픔으로 괴로워 하는 몸은 타인에게 속절없이 맡겨지는 탓이다. 세계와 인생이 덧붙여 준 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사회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사회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아는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자아 못지않게 우리의 본래적 자아이다. 사회는 치통과 생각의 혼란으로 괴로워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무심하게 등을 돌릴 뿐이다. 사회는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가 사회에 순응해야만 한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른 것은 작용과 반작용 행위와 반응이 부딪치며, 긴장을 이루는 힘의 장이다. 이런 현실이 자아에게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강요된 자아가 결국 자아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늙어감이라는 게 일종의 고통이며, 아픔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몸, 곧 몸 자아가 사회와 겪는 모순에서도 나타난다. 이 몸 자아는 옷인 동시에 옷이 입혀진 몸통이다. 늙어가며 우리는 어떤 자아에 매달릴까? 확실히 알든, 아니면 그저 상상하는 것이든, 어떤 자아에서 이전이나 이후보다 더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여길까? 우리는 기억을 통해 우리의 사회적 자아를 재형성하거나, 새롭게 해석한다. 우리의 사회적 자아는 타인의 시선에서 형성 되었을 뿐 아니라, 상당부분 단순한 짐작으로 생겨났다. 늙어가며 우리는 자신이 낯설어진다.
'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유나 존재냐 (0) | 2015.09.26 |
---|---|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는 나 (0) | 2015.09.24 |
노화 (0) | 2015.09.22 |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있다. (0) | 2015.09.20 |
시간의 무게와 죽음 (0) | 201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