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타인의 시선으로 정의되는 나

노화의 고통 탓에 나의 자아가 무수히 분열해 버린다. 내가 가진 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게도 나를 가진 타인으로, 사유실체와 연장실체로, 기묘하게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반응으로 추론해낸 ‘나’, 곧 사라진 시간으로 보존되는 ‘나’와 매일 변화하며, 늙어가는 나로의 분열은 정말 불가사의 하다. 우리가 그리는 자신의 그림은 혹시 사회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도대체 내가 그리는 나의 모습이 가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아는가? 우리가 처한 운명을 두고 성찰할 때, 부조리함과 혼란스러운 생각에 빠질 위험은 피할 수 없다. 늙어감은 우리에게 그런 성찰을 피할수 없게 만든다. 논리는 세계를 모사하려 안간 힘을 쓰지만, 세계는 늘 논리로 부터 멀리 달아나지 않는가.  모순으로 점철된 세상을 극복하고, 논리로나마 더 나은 세상을 그려보려 했던 사색은, 이제 더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갈수록 짙어지는 통에 견디기 힘들다. 그에게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겪은 굴욕은 그 개인의 여러 우연한 상황과 거의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시대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요구, 곧 물질의 생산과 성장만 요구하고 재촉하는 시대의 분위기 탓에 오로지 젊은이만 일하고 놀수 있다는 식의, 말하자면 아이돌 숭배가 사회의 지배적 흐름으로 자리잡아 강요된 굴욕이라는 논리도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갈수록 노인들이 많아지는 오늘날의 사회는 나날이 노인을 어찌 다뤄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 할 따름이다.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사회적 연령이다. 사화적 연령이란 타인의 시선이 우리에게 측정해 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인인 우리는 타인 없이는 살 수 없지만, 또한 더불어 살 수도, 타인을 거부하며 살 수도 없는 기묘한 운명을 감당하며 살아간다. 모든 인간의 인생에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어떤 것인지 발견하게 해주는 일종의 점과 같은 시간이 있다. 당사자는 세계가 그에게 미래의 신용을 더는 인정해주지 않으려 하는, 아예 미래 자체를 인정해 주지 않으려 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달라질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은 자신이 여전히 가능성을 가졌다고 믿지만, 사회는 그를 보고 그리는 그림에서 그런 가능성 자체를 지워버린다. 아무도 그에게 '앞으로 뭐할래?' 자체를 묻지 않는다. 모두 냉철하고 확고한 태도로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이미 했잖아!'하고 등을 돌린다. 타인은 이미 결산을 하고, 현재의 잔고만 확인시켜준다는 점을 당사자는 쓰라리게 경험한다.

 

A는 화가였다. 무명으로 남았거나,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거나. 총량적으로 성공했다고 평가 받았다면 유명세를 지금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성공을 이루어내지 못해 그의 예술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면, 그는 자신의 예술적 존재의 부정인 '실패한 작가'라는 낙인이 찍힌 채 계속 화가이기를 고집해야 만할까? 그가 자기 자신의 일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어제까지 시도해 왔고, 포기한 일의 총량일 뿐이다이게 앞으로 남은 세월 역시 결정하고 만다. 결국 그의 여생은 헛되이 보낸 세월과 똑같은 모습의 지루한 반복이 될 뿐이다. 넘어져 쓰러졌는가 싶더니 다시 툴툴 털고 일어서며, 길이 막혀 돌아가는가 싶더니 돌연 환히 열리는 전망에 감격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중간 단계는 마지막에 가서야 그 본래적 의미를 부여 받을 따름이다. 갈수록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서로 의존해야만 되는 사회가 되는 세상에서, 고갱과 같이 과감하게 탈주를 시도하는 사람은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지리라. 잔고-자아, 사회가 계산한 결산,결과는 이제 아무 반론 없이 감수하고 내면에 새기며, 심지어 결국 스스로 요구하는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하는 바로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해낸 일을 헤아려 무게가 재어진 늙어가는 인간은 심판 받았다. 이 말은 그의 사회적 존재에 높은 사회적 가격이 매겨진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무얼하며 인생을 살았는지 생각해 본 일도 없다는 뜻이다. 과감하게 단절을 시도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일은, 그의 지평선에선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가 살아온 그대로 죽으리라. 평생 명령 받아온 병사처럼 얌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