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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병을 앓는 사람이 공간과 시간에서 방향을 잃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공간에서는 실제로 정신적 손상을 입은 사람만 방향을 잃고 헤매지만, 시간에서는 건강한 사람도 얼마든지 방향감각을 상실할 수 있다. 시간을 헤아리기 위해 필요한 눈금표가 기실 노인에게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5년전이라고 해서 15년전과 다르게 느껴지는게 아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다시 바깥으로 나가는 일, 공간으로 나서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음만 두려웠다.  나의 것으로 차지하는 공간은 동시에 타인의 공간이기도 하다. 공간은 서로 의사소통해 가면서 파악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시간에서 나는 그저 홀로 있다. 나는 내 시간과 더불어 혼자 있을 따름이다.

 

살아낸 시간, 그것은 그의 재산이자 그의 독특함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살아낸 시간, 자신의 자아를 규정해 주는, 살아낸 시간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속임을 당한다. 세계내 존재, 공간이라는 세계로 자신을 내던지는 기투企投(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방식)에서, 나는 내가 아직 아니라는 사실을. 내가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세계를 상대로 하는 싸움과 세계를 가지고 노는 섬세한 유희를 통해서만 이룩될수 있음을 깨닫는다이제 흘러가 버린 시간, 세계가 없는 시간, 시간속의 나는 아무 감흥도 없는 슬픔과 체념이라는 느낌을 가질 따름이다.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며, 현실의 일부라는 점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은 럼에도 누군가 자꾸 현실을 믿으며, 현실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안으로 들어가 활동 하고자 주장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일단 반항을 시작한 사람은 다른 이들과 어울릴 수 없다. 그는 세상에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수첩에 약속시간을 적고, 시간을 적고, 여객선의 자리를 예약한다.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평안함 속에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가진다. 그래야 사회생활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순식간에 사라지며,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나'라고 말하지만 그 숨은 뜻은 내 시간일 따름이다. 그리고 갈수록 그는 다른 사람이 낯설어진다. 노인은 거울에 미친 모습을 증오한다. 눈 위로는 마치 모자처럼 생긴게 머리라고 걸려 있으며, 눈 아래 있는 넙데데한 얼굴은 무슨 가방 같다. 입주변에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해 서글퍼만 보인다. 이제는 낙엽으로 뒤덮인 것만 같은 머리를 보면 한숨짓는다. 매일 아침 거울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몸의 퇴화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심정이랄까?

 

내가 아닌 '나'가 되는 깊은 충격이 노화의 진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에는 당연하다고만 여겼던게 돌연 낯설기만 한 것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돌연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것, 곧 나 아닌'나'가 평소 익숙한 나를 문제 삼으면서 충격과 경악이 고개를 든다. 

그는 자신이 낯설기만 하다.  매일 아침의례라도 치르듯, 거울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어린 시절과 나중에 커서 보낸 절정의 시절에 이끌고 다니던 외적인 나, 곧 외모와는 거의 아무런 성관이 없거나, 있어도 조금일 뿐이다. 여전히 의식의 높은 층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나는 아직 젊게 느껴져.”

 

배불리 먹고 건강한 사람은 위장을 잊는다. 내 얼굴을 그 어떤 불쾌감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한, 나는 내 얼굴을 잊고 지낸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더는 내 얼굴을 미워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얼굴이 싫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당해 낯설게만 여겨질 뿐이라는 것도 안다. 나의 일부인 얼굴은 곧 나 자신인 동시에 세상이었다. 그때는 아직 자기 자신에게 소외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제 변모해 버린 지금, 많은 경우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까지 갈 것처럼 보이는 마당에 낯설기만 한 얼굴은, 더는 세상으로 향해진 게 아니다. 이게 모든 늙어가는 사람이 겪는 근본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