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피곤한 나머지, 길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좀 쉬고 싶다. 한때는 이제 위대한 미래가 나를 맞아주리라 믿었다. 나는 바램과는 다르게 바뀐 세상에 나를 맞추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내가 달라지기를 원했으며, 너무나도 불평등한 싸움을 치르게 하며 승리를 앗아갔다. 소신만으로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유혹만 남발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숨 좀 돌리며,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리라. 가야할 길은 갈수록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그에 반해 다리는 계속 짧아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숨 쉬기가 힘들며, 근육은 허약해지고, 머리는 멍하기만 하다. 그러나 멍한 머리로도 얼마든지 살아있음과 헛되이 흐르는 시간을 이마에 갈수록 선명하게 새겨지는늙음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간은 공간과 달리 현실의 논리를 알지 못한다. 과거, 현재, 미래. 과거는 이미 지나가 내 뒤에 있는
것이며, 현재는 나에게 그리고 나와 더불어 있는 것이고, 미래는 내 앞에 있다. 이게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시간이다. 현재를 말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일련의 자료들을 가지고 어떤 시스템, 곧 장場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한다. 아무래도 이 장場이라는 표현이 더 나아보인다.
나는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지금'을 이야기한다. 이 지금은 과거와 미래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러니까 내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에는 미래와 과거를 포괄하는 시간의 장이 성립한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것은 세계 안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전혀 개인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 노인은 자신에게 더 이상 많은 게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자신이 시간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노인은 이제 더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이는 출세하려 안간힘을 쓴다. 반면 노인은 대부분의 인생을 등뒤에 두었다. 그리고 남은 인생마저 더는 실감나게 살 수 없다. 노인의 인생은 다름 아닌 모아놓은 시간, 사라질 시간,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젊은이에게 세상이 활짝 열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인은, 혹은 늙어가는 이는 미래를 매일 같이 공간의 부정으로 경험하고, 이로써 실제로 일어나는 일의 부정으로 경험한다.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세계이자 공간이라고 우리는 말하곤 한다. 젊은이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뭔가 격렬한 흥분을 일으키는 일을 기다리는게 젊은이로 하여금 이리 저리 기웃거리게 만든다.
아무것도 기대할게 없거나, 고작해야 중요하지 않은 일만 예상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과거로, 과거의 그 깊은 우물로 빠져들어 그 안에서 침묵한다. 인생이었던 것, 세계였던 것, 공간이었던 것이 이제는 그저 시간일 뿐임을 깨닫고, 헛된 자기연민으로 안타까워하면서 시간의 흔적을 찾으려고 눈을 감는다. 늙었다는 것 혹은 늙어간다는 것을 감지한다는 말은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는 말이다. 젊다는 것은 몸을 시간에게로,원래 시간이 아닌 인생이자, 세계이자 공간인 것으로 던진다는 뜻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드러난 이마의 주름살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름을 통해 그 주름과 더불어 살아서 돌이킬수 없는 지난 20년 세월의 전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다시 20년 뒤에 나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나는 이제 얼마남지 않은 세상을 앞에 두었다.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안에 쌓인 시간을 인생으로 기억한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은 그를 공간에서 통째로 들어내리라. 그에게서 세상과 인생을 앗아가리라. 그의 공간을 빼앗으리라. 늙어가는 사람은 다만 시간일 뿐이다. 노인은 전적으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이자 시간의 소유자이며 시간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그 어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 무엇이 출현할 미래가 나의 기다리는 시간을 채워준다. 이를테면 청년은 자신이 사랑할 처녀를 기다린다. 간절히 보고싶은 풍경을 기다리며, 자신의 것으로 자랑스레 선보일 작품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의 목표가 죽음이라면, 그래서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에게 이 죽음이 매일 더욱 더 현실의 무게를 얻어, 기다림의 다른 보상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경우에는, 미래를 향한 시간이라는 말을 더는 할수 없게 된다. 우리가 기다리는 죽음은 그 어떤게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시간 차원으로서의 미래를 우리에게 구해주지 못한다.
노인은 나이를 먹으면서 비로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흔히 '인생의 가을'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메타포다. 가을! 가을에는 겨울이 뒤따르며, 다시 겨울에는 봄이, 그리고 여름이 따라온다. 그러나 노인이 맞이하는 인생의 가을은 마지막 가을이다. 그러니까 본래적 의미에서 가을이 아니다. 늙어가는 사람은 지난 계절들을, 그의 자신안으로 들어온 계절들을 아쉬워하며,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자신이 그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은 노인, 그래서 곧 공간으로부터 물러나게 될, 나이 먹어가는 사람에게 많은 기만적 위로가 주어진다. 내 인생의 의미는 곧 무의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저 뭉쳐진 시간 덩어리이다. 현실은 예전의 가능성을 깨끗이 씻어버렸다. 그저 변두리에서만 머물러 산 인생, 이제 모든 것을 놓쳐버린 지금 물끄러미 바라보는 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 아마도 후회와 '다시 오지 않음'이 죽음을 바라보며 느끼는 두려움의 뿌리가 아닐까. 시간은 여전히 그 자신인 모든 것이다. 그는 저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간에서 버릴게 거의 없다. 노인은 시간과자신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게 내일인지, 1년뒤, 5년뒤, 혹은 10년뒤 일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늙어감에 대하여: 저항과 체념사이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누구이며, 내가 아닌 나는 또 누구인가? (0) | 2015.09.23 |
---|---|
노화 (0) | 2015.09.22 |
시간 속에서 나는 홀로 있다. (0) | 2015.09.20 |
늙어가며 시간을 발견한다. (0) | 2015.09.15 |
속절없이 흘러가버린 세월 (0) | 2015.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