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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진화의 오디세이 (김용환)

신석기문화의 발달(2)

 

알자지라로 불리는 스텝평원은 중산간 구릉의 고원지대로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석회암 암반 위에 조성되었다. 여기서는 4월에 추수하는 일모작 작물에 충분할 정도로 겨울 강수량이 있어서, 천수 농경이 가능했다. 이와 달리 메소포타미아 평야는 서로 멀리 떨어져 흐르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가까워지면서 퇴적층이 쌓여 형성된 삼각주 평야였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지대는 5월부터 10월사이에 낮 평균기온이 섭씨 40도에 이를 정도로 더웠고, 8개월간 비가 오지 않아 매우 건조해서 뜨거운 진흙먼지 바람으로 뒤덮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만 원활하게 공급된다면 비옥한 토양과 더불어 높은 온도는 식물생장을 엄청나게 촉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곡창지대로 탈바꿈 시키기 위해서는 농경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고, 범람을 방지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물을 공급해야 했다. 강이나 호수, 늪지의 어족자원이 생존에 필요한 단백질 공급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정착하면서 경작의 부산물을 이용해서 소를 키울 수도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평야는 건조해질 경우 딱딱한 진흙땅을 개간하기 위하여 호미보다 쟁기가 필요했다.

 

메소포타미아 퇴적층에서 복합사회는 남부지역에서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리두에서는 진흙 벽돌로 만든 신전을 중심으로 엘리트의 저택으로 보이는 가옥들이 둘러있고, 인근에 장인들의 주거지, 외곽에는 농부들의 가옥이 있는 취락유적지가 나타났다. 이런 형태의 복합사회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뿐만 아니라, 자그로스 산맥의 동쪽기슭 수시아나 평원을 비롯한 넓은 계곡에 확산 되었다.  이 같은 도시화는 주변의 농촌지역을 버리고 주민들이 이주했거나, 혹은 강제로 소개疏開(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된 결과 인듯하다. 도시화의 경향은 이미 우바이드 시대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주요지역의 취락들 대부분이 요새화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초기의 도시화는 지역간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방어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노동력과 농산물의 운송비용이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마도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도시화와 함께 주변지역을 집약적으로 경작하기 위하여 대규모 관개시설을 만들었던 듯하다.

 

우루크시대 말기인 기원전 3000년에는 문자가 최초로 나타났다. 문자는 점토판에 새겨져 있었는데 주로 물품을 나타내는 그림문자의 형태였다. 기원전 3000년에 이르러서 정치적으로 독립된 도시국가는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12-14개에 달했다. 이들 도시국가는 전채적으로 10만명의 인구규모를 나타냈고 수메르 문명이라고 불리는 단일 문화권을 형성했다. 도시국가들 사이에는 갈등이 심화되어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전쟁은 기원전 2350년 아키드의 사라곤 서남아시아를 통일할때까지 지속되었다. 수메르 사회에서 왕은 신격지위를 누리면서 사회의 정점에 있었고, 그 주변에는 귀족들이 포진했다. 부유한 상인계층 밑으로 장인이나 농부계층이 자리했고, 사회의 최하층에는 노예들이 있었다. 수메르 문자는 알파벳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표음문자는 후대의 문자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수메르인은 설형문자로 쓰인 점토판에 다양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금석학자들의노고 덕분에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당시의 다양한 사회제도와 삶의 모습이 알려질 수 있었다.

 

기원전 2350년 아키드에 의해 통일된 후에도 서남아시아 지역은 분열과 통합의 주기가 반복되면서 우르왕조, 바빌론 제국, 그리고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제국이 차례로 지역의 맹주로 부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칼 하게도 식량의 보고로서 수메르 문명의 기반이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현재 거의 사막화 되어 불모의 땅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막화는 이미 수메르시대 말기에 진행되기 시작한 듯하다. 현재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점유하고 있는 이라크는 식량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복합사회가 형성되면서 인간의 삶은 변질되었다. 인간의 부도덕성 혹은 비윤리의 원천은 타인을 사물로 취급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웽크는 이것이 바로 복합사회의 발달이 가져다준 원죄 같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르 왕조의 무덤은 문명이 인간의 삶에 혜택과 행복을 가져다준 것만은 아님을 일깨웠다. 이미 수메르 시대의 기록에서 가난과 세금, 폭군과 폭정 등 복합사회의 병폐에 관해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공평하게 나누었던 지난 시대의 단순했던 삶에 대한 동경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듯하다. 이미 기원전 3000년전 지구상에 나타난 사회적 삶의 다양성은 거의 정점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밴드유형의 사회로부터 부족사회, 족장사회, 그리고 국가사회가 여기저기서 펼쳐졌다. 하지만 복합사회의 제도와 지배구조는 문명의 이름으로 종종 침략과정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더욱이 지리상의 대발견은 그동안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던 아직 단순 사회의 삶을 누리던 수많은 부족들을 그러한 흐름에 노출 시켰다. 그리고 사회적 진화의 힘을 거스를 수 없는듯 그들은 모두 국가사회로 재편되고말았다. 이 같은 사회의 진화의 힘은 또한 일단 형성된 복합사회가 과거의 사회로 회귀하지 못하게 하는듯 단순 사회의 삶은 영원한 유토피아의 꿈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