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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진화의 오디세이 (김용환)

구석기 문화

19세기 중엽 존 러벅은 북유럽의 선사시대 도구 양식을 시대적으로 구분한 석기-청동기- 철기라는 삼분법을 도입하고, 석기시대를 다시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누었다. 다양한 유물이 발굴되면서 석기시대를 전기구석기, 중기구석기, 그리고 후기구석기 시대로 세분했다. 로버트 엥크는 중기구석기 및 후기구석기 문화의 특징을 직립원인의 전기구석기 문화와 대비하여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첫째 뇌용량이 1100cc에서 1400cc로 증가했다. 둘째 두개골의 생김새가 달라졌다. 셋째 집단의 인구가 증가했다.  넷째 도구 제작의 기술적 개혁이 있었다.  다섯째 조각상, 벽화, 부조, 무덤 등 예술적 유물이 발견되었다. 여섯째 체계적인 집단수렵이 이루어졌다. 일곱째 유물의 양식과 원거리 교역이 생겨나면서 지역적인 문화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기구석기 유적에서 특기 할만한 점은 네안데르탈인이 의도적으로 시신을 매장했다는 것이다여기에는 또한 고깃덩어리와 도구가 부장품으로 함께 매장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감정능력은 이타적 수준까지 이르러 집단성원들간의 결속관계를 공고히 한듯하다.

 

국내에서는 전기구석기와 후기구석기에 해당하는 유적지가 여기저기 나타났지만, 중기구석기의 유적은 발견되지 읺았다. 유일하게 중기구석기의 유적이라고 주장되는 평양의 역포유적에서는 직립원인과 네안데르탈인 중간 형태로 보이는 소녀 두개골이 발견되었지만, 고인류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베이징에서 발견된 직립원인이 홍적세 중기에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자체적으로 진화하지 못한 듯하다. 후기구석기 문화는 4만-5만년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현생 인류와 함께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가 다양한 활동에 종사하게 된 것은 식량자원의 성격과도 연계된다그 당시 유럽의 빙하전선이 남하하여 드넓은 스텝초원이 조성되었고, 프랑스 남서부지방에서는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특히 험준한 지역에서는 들소, 말, 순록 염소가 무리를 지어 다녔고, 개방된 초원에서는 매머드, 털코뿔소, 야생소 등이 다녔다.

 

이렇듯 풍요로운 사냥감에다 씨없는 작은 과실류, 도토리류, 개암류 등의 다양한 열매는 그 당시 주민에게 또 다른 종류의 식량을 제공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일어난 기후변화는 이런 식량자원의 기반을 수시로 바꿔놓기도 했다. 인류는 기후변화에 재적응하면서 주어진 식량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후기구석기 시대의 다양한 도구와 생활양식은 그 같은 재적응과정의 산물이기도 했다. 후기구석기 시대에 나타난 정착생활은 지역내 식량자원에 대한 세부지식과 정보를 증대시켰고 도구의 개발에 기여했을뿐 아니라, 원거리 교역도 촉진시켰던 것 같다. 비실용적 유물이나 유적은 후기구석기 문화의 특징 처럼 보인다. 후기구석기 문화의 백미는 동굴벽화일 것이다. 스페인 피레네 산맥의 어귀의 알타미라 동굴벽에 그려진 돌진하는 들소는 매우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걸작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의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서 후기구석기 시대의 문화적 도약을 체감할 수 있었다.

 

후기구석기 문화적 지식을 바탕으로 혹독한 추위의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갔고, 베링해협을 지나서 최초 아메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동남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진출했고, 나중에 태평양 무인도로 향하는 항해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남극을 제외한 지구상 모든 지역을 현생인류가 점거하게 되었다. 농경기술이 없는 단계에서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수렵채집생활을 영위하는 입장에서 열대림에는 인류가 이용할만한 식량자원이 오히려 적었다. 더욱이 동물도 무리를 짓지 않는 데다가 수생생활을 하거나, 야행성이어서 잡기 힘들었다. 즉 식량자원에 관한한 열대림 지역은 예측성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