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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진화의 오디세이 (김용환)

신석기문화의 발달(1)

신석기 문화의 발달 과정은 네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취락 규모의 변화, 사회계층화, 대규모 문화권의 형성, 그리고 식량생산성의 증가이다. 먼저 신석기 문화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경작에 따른 정착생활은 출산을 증가 시켰고, 그 결과 인구가 늘어났을 것이다. 이에 따라 취락 규모가 커지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도 발달했을 듯하다. 특히 가족 단위의 생산이 촉진되면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는 사회계층화로 이어졌을 듯하다. 또한 장거리 교육이나 토기 제작술 같은 기술발달은 대규모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취락규모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기원전 7350년경 오아시스 주변에 자리 잡았던 예리코의 취락지 유적이다원형가옥들이 성곽으로 둘러싸여 밀집된 취락구조를 이루었는데 소도시 혹은 읍 규모였다. 

 

서남아시아에서 신석기 농경사회가 도시문명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 다른 현상은 토기문화권의 발달이다. 토기는 이동생활을 하는 수렵 채집자들에게는 무겁고 깨지기 쉬운 물건이지만, 정착생활을 하는 신석기 경작자에게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하다. 토기는 수렵채집자들이 선호하던 박이나 바구니처럼 담는 기능을 하면서도 썩지 않는다. 불위에서 조리도 할 수 있다. 이미 후기 구석기시대에 점토의 성질을 터득한 인류는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토기를 선호 하게 되었을 것이다. 신석기 사회에서는 아직도 수렵과 채집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고, 이것은 농경을 통한 식량 생산성이 아직 높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신신석기 사회는 주로 중산간 구릉지대의 스텝평원에서 발달했는데, 더 낮은 지대로 이주하면서 관개시설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개시설에 대한 지식은 고대문명이 건설되는 메소포타미아 퇴적평야로 나아가는데 필수적이었던 반면, 그 당시의 관개시설은 매우 단순한 것이었다.

 

단순 사회인 밴드사회와 부족사회가 대체로 평등사회라면, 복잡사회는 노동분업이 일어난 결과 사회적 지위가 분화해서 계층화가 이루어진 불평등 사회이다. 인류학적 조사에 기초한 사회의 분류에 따르면, 복합사회의 유형에는 족장사회가 국가사회가 있다. 족장사회는 수천명의 인구와 몇개의 마을을 포괄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이다. 국가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중양관료들이 정치, 경제를 통제하는 체제이다. 인구와 영토가 족장사회에 비해 훨씬 크며 마을, 읍, 심지어 도시의 다양한 취락형태를 갖는다. 고대문명은 여섯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출현했다. 소위 6대문명으로 알려진 중국문명, 인도문명,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문명그리고 신대륙의 중미문명과 페루의 안데스문명이 그것이다. 차일드에 따르면 고대문명이란 도시화를 이루고, 식량 생산성이 높아서 장인, 사제, 교역자 등 식량생산 이외의 부문에 전업적으로 종사하는 사회구성원들을 뒷받침할 수 있고 야금술과 문자가 발명되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중앙집권제가 확립된 사회였다.

 

농경에서 제한적 요인은 토질, 기온, 물인데 인간이 가장 조작하기 쉬운 것이 물이었다. 물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저수지, 제방, 운하, 배수로 등을 건설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대규모 집단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또한 이런 노동력을 조직하고, 관개시설을 잘 유지하면서 적시에 수량을 조절하거나 배분하기 위해서는 관리조직과 의사결정 기구가 필요했다이런 필요성 때문에 중앙통제기구가 설치되면서 전문지식과 통솔력을 갖춘 엘리트 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엘리트 집단은 관개시설을 보호할 목적으로 상설군대를 만들고, 기존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종교적 지위를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 노동력을 전용하여 신전이나 왕궁을 짓기도 했다. 또한 의사전달 체계를 확립하고, 노동력과 물자를 순환시키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이와 더불어 회계나 재고 기록을 위해서 문자를 발명했고, 농경과 치수관리를 위해 달력을 만들었다.

 

카네이로는 복합사회 형성의 제1동인은 전쟁이며, 이는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하여 페루, 이집트, 로마등 다양한 지역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복합사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필요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인구의 증가와 환경적 제한이었다. 즉 단순한 인구증가가 복합사회를 낳은 것이 아니라 비옥한 지역이 사막이나 산악 혹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환경적으로 제한 되어 있을 경우에만 인구증가가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복합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안데스 산맥의 태평양 연안지역을 모델로 삼아 전쟁설의 시나리오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처음에는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강들의 유역에 다분히 독립적인 신석기 농경마을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인구가 증가하고, 마을 내부에서는 경작지를 둘러싼 갈등이 생기면서 새로운 마을들이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지속적인 인구 증가와 함께 경작지가 한계에 다다르면서 농경의 집약화가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 식량난이 심각한 마을은 주변의 취약한 마을을 공격했고, 전쟁이 벌어지면서 영토가  합병되기 시작했다. 피정복자들은 농노나 노예로 전락했다. 정복자들은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하거나 노예를 관리하기 위한 관료체제를 구성했다. 관료체제는 사회통합에 기여했지만, 부와 권력의 편차가 심해지면서 사회계층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이 합산되고 심화되면서 결국에는 소규모 국가들을 통합한 더욱 광범위한 영토의 국가가 형성 되었다. 더욱이 인구가 안정 되면서 환경과 균형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회에서도 내적 갈등, 이를테면 계급 갈등을 해소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정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국가가 성립될 수도 있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