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이라는 형용사는 어떤 삶을 평가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가치를 가리키지만, 그 가치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치 않다. 삶의 의미와 관련해 내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다양한 실제 사례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개념을 담고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떠나서, 삶의 의미는 다분히 철학적인 개념일 수 밖에 없다. 내가 제시하는 삶의 의미라는 개념은 가치 있는 대상을 사랑할 때, 그리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 대상에 관여할 때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사랑'이나 '관여'라는 단어는 어떤 측면에서는 오해를 불러 일어킬수 있는 용어이며,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 대상에 관여 한다는 표현 또는 애매모호 하다. 가치가 있는 대상을 사랑한다는 말도 어떤 것들이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가와 같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양한 용어를 통해 삶의 의미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내가 진정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그려보겠다.
사랑은 부분적으로 주관적인 요소로서 태도와 느낌을 수반 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이 사랑할 만한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때, 삶의 의미라는 개념은 객관적인 요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주관적인 이끌림이 객관적인 매력을 만났을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한 사람이 어떤 대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을 때, 뭔가에 빠져있거나 열광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때, 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뭔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삶이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런 활동이나 대상 자체가 가치없다면, 아무리 열정적으로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의미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삶의 의미가 결핍돼 있다는 걱정이나 불안은 주관적인 삶의 질에 대한 불만으로 종종 표출 된다. 다시말해 어떤 주관적인 요소가 빠져 있고,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런 공허함을 채워주고 충만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뭔가를 갈망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평가하면서, 어떤 이들의 삶은 특별히 의미있고 어떤 이들은 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삶에서 추구했던 객관적인 가치에 대한 평가기준을 드러내는 것이다.
의미라는 표현이 다양한 문맥속에서 정확하게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가치 있는 삶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돼 있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의사나 성직자 또는 동기부여를 주제로 강의하는 강연자들이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할 때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관심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들의 조언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삶에서 특정 형태의 좋은느낌을 얻을 수 있어서 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할 때, 완전히 몰입해 있을 때, 가슴을 뛰게 만드는 활동에 참여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성취감이라고 정의해 보자. 성취감은 지루함이나 소외감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감정이다. 즉, 성취감은 분명히 긍정적인 감정이다. 영화배우를 만나거나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바겐세일 기간에 멋진 옷을 쇼핑하는 일 등은 모두 우리에게 기쁨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성취감과는 무관하다. 다양한 일을 추구하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동시에 고통과 좌절감,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성취감을 주는 대상에 시간,에너지, 돈과 같은 자원을 투자하는 시도는 어쨌든 간에 그저 즐거운 일에 참여하고자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고갈시킨다. 게다가 쾌락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성취감을 주는 일은 근심과 고통도 동시에 준다는 점에서, 성취감이라는 긍정적 감정은 그에 따른 부정적 감정에 제약을 받거나 상쇄될 위험이 있다. 자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이를 추구하라는 관점을 '성취관점'이라고 부르자. 어느 길로 가야할지 내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안락, 명예, 부와 같은 피상적인 목표에 집착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조언을 들려준다. 성취관점 역시 쾌락주의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쾌락주의가 말하는 최고의 삶의 기준은 전적으로 각각의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질적인 특성에 달려 있다. 이런 까닭에 삶의 의미를 찾는데는 성취의 관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이 애완용 금붕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열정과 태도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금붕어가 충분히 산다면, 우리는 개인의 행복이라는 차원에서 이들의 삶을 더 없이 좋은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만일에 신이 시지푸스를 불상히 여겨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이 고통스럽고 힘들며 끔찍한 노동이 아니라,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느끼도록 그의 몸에 주사를 놓는다면, 이제 우리는 시지푸스의 삶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가 시지푸스의 삶을 의미없는 삶의 전형으로 꼽는 이유는 힘들고 허무한 노동을 영원히 수행해야 하는 형벌 때문이다. 그런 일은 비록 성취감은 있지만 추구해야 할 소중한 가치가 결핍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의미를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관여는, 자신과 동떨어진 자신의 외부에 가치의 원천을 두는 대상에 '관여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성취관점은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반드시 포함해야 할 주관적인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주관적인 조건을 충족했는 데도 불구하고, 행위자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와 아무런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않다면, 의미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의미있는 삶이란 행위자 스스로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행위자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에 긍정적인 관여를 하는 삶을 뜻한다. 나는 성취감을 느끼는 시시포스의 사례와 같이 자신 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에서 어떤 가치가 결핍되어 있는지 언급했다. 스스로 관여하고 있는 활동에 담긴 객관적, 외적, 독립적인 가치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관여 덕분에 자신들의 삶이 더욱 의미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징용이나 징병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닌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일에서 객관적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그 활동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삶의 의미라고 부를만한 중요한 가치는 결핍돼 있다고 느낄 것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성취감을 제공하는 대상이나 활동에 대해 가치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성취의 과정에 인지적 요소가 포함돼 있어야 한다. 화창한 어느날 평화로운 해변에 누워 있거나, 아주 잘익은 복숭아를 맛보는 것은 분명 즐거움을 주는 일이지만, 우리는 거기서 성취감을 느낄 수는 없다. 어떤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긍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치가 그 속에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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