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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퀘스천 (줄리언 바지니 지음, 문

더 커다란 이익

이타주의에게 가치의 기본 단위는 개개인의 생명과 삶이다. 따라서 선행은 곧 개인을 돕는 것이다. 종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가치의 기본단위는 전체 종이며, 개개인을 돕지 않고서도 종의 이익에 기여할 수 있다. 종에 기여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사회 같은 것은 없다. 개별 남녀와 가족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처는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구체적인 개별자들이고, 이 개인들로 구성된 그 밖의 다른 것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복합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데릭 파핏의 국가존재론이 있다. 현대의 고전 ‘이성과 인간’에서 파핏은 국가같은 실체의 존제에 관한 시각을 세가지로 구분했다.

 

1. 국가의 존재는 단지 영토안에서 특정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시민의 존재를 포함한다.

2. 국가는 단지 시민과 영토이다.

3. 국가는 시민과 영토와 구별되는 실체이다.

파핏은 1번과 3반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은 같은 영토안에서 특정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 전부다. 그런 국가라는 것은 그 국가의 시민이나 영토와는 구별된다.

 

같은 모델이 종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1. 종의 존재는 단지 개개 구성원들의 존재를 포함한다.

2. 종이란 곧 개개 구성원이다.

3. 종은 개개 구성원들과는 구별되는 실체이다.

이번에도 2번은 단순하지만, 1번과 3번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하나의 종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은 개개 구성원들이 전부이다. 그러나 이 종이라는 것을 개개 구성원들과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 종에 관해 참인 것이, 개개 구성원들에게는 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이 진보하도록 기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축적한 성과를 기반으로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야 한다. 이것은 지식과 성취의 한계를 넓히는 것에서부터, 사회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단순히 아이를 기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방식으로 실행 될 수 있다.

 

우리은 삶의 의미가 '지금 여기 있는 우리를 넘어선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유토피아는 구현하기 불가능할 뿐아니라,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재앙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가능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수많은 개인이 자기의 이해를 머릿속에 그려진 사회의 이익 혹은 사회의 진보에 종속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어떤 것을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지를 먼저 검토해보면, 이런 추상개념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두는 것이 왜 그릇된 일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느낌이나 지성, 의식을 통해서만 가능해지거나, 이해할 있는 현실의 측면들에 큰 가치를 둔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눈으로 보든 안보든 간에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알아볼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나무 막대기나 돌들 같은 느끼지 못하는 무엇이다. 종과 생태계 같은 것에도 집단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생각은 추측, 그것도 매우 거친 추측일 뿐이다. 종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줄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초월이란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주관적 실존의 한계에서 벗어나 더 커다란 무엇에 참여하는 일이다. 우리의 삶과 믿음이 우리 외부의 어떤 것에 비추어 판단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만, 우리의 실존을 견딜 있다. 이것이 내가 설명했던 종류의 초월을 향한 욕구이다. 그것은 반드시 초월론적 영역이나 존재일 필요는 없으나, 우리보다 커다란 무엇인가로서 우리의 믿음과 행동은 그것에 비추어 판단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는 초월을 욕구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초월을 향한 인간적 욕망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자연밖의 초월론적 실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종은 개체성을 초월하긴 하지만, 무슨 영혼 같은 초월론적 영역에 속하지는 않는다. 자기 인생의 목적을 종의 목적과 관련짓는 일은 유한한 개체로서의 인간본성을 초월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종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할 정도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지는 매우 알기 어렵다.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복잡한 언어와 의식, 놀라운 수준으로 환경을 조작하는 능력, 자연의 근본적인 작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이록해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 어떤 종류의 기여가 의미를 부여해 주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없다. 개인적인 느낌이 중요한 영역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자신들이 믿는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하찮은 일을 하는 것조차 행복해 한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세상 반대편에 폭풍을 몰고 온다'는 카오스이론의 오래된 이야기도 위안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가 개인의 중요성을 쉽게 일축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만일 종의 진보를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군집안의 개미들과 같아진다. 몇 명을 깔아뭉게도 집단은 상관없이 제 갈 길을 계속 간다. 개인으로서 자신의 중요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집단적 목적을 얻는다. 개인은 두가지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개인은 무엇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주는지, 또는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원천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개인은 삶의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때 개인적인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 두가지 단계, 곧 인식과 수용은 오로지 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 삶의 의미는 개인을 만족시켜야 한다욕구는 우리는 길 잃고 헤매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욕구를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그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실수하는 지점은, 일종의 추상개념인 종의 안녕을 종에 속한 구성원들의 안녕보다 우위에 둘 때이다. 사람은 고통, 기쁨, 사랑, 쾌락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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