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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퀘스천 (줄리언 바지니 지음, 문

도우러 왔습니다.

인간은 남을 도움으로써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사는 무기치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남을 도움으로써 자기 개인의 존재에 대한 좁고 제한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자기존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는 더 커다란 선善에 참여하게 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남을 도우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얻게 되었다고 느낀다. 왜 이타주의가 삶에 의미를 주는가?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철학은 종종 평범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물을 필요 조차 없어 보이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진보한다토의가 성과를 얻으러면, 이런 개념의 명료화는 필수적인 일이다. 가령 자유라는 말을 당신은 정부에 의한 속박이 없음 뜻으로 사용한다면, 이 차이점을 인식하지 않는 한 자유에 관한 우리의 토의는 동문서답이 될 것이다. 무엇이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가?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을 러뜨렸을 때 어떤 사람은 선한 해위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은 끔찍하게 사악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옳은가?

 

칸트는 사람이 순수하게 도덕률에 의한 의무감으로 행동할 때만,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사람은 옳은 일을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단지 선한 경향이 있거나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행동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운의 문제이다. 즉 어떤 일을 했는데 우연히 옳은 일이었던 것이다. 이타주의의 핵심은 분명 이타주의는 사람을 돕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선하다는 점이다. 도덕적 계율을 따르기 때문에 이타주의가 선한 것은 아니다. 규범 자체를 위해 규범을 따르는 행위가 도덕의 전부이자 궁극인양 생각하게 만든다. 분명 선한 헹동이 낳는 효과도 참작해야 함에도 말이다.

 

누가 도움을 받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왜 도움을 받는가?  빈곤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이 모두 같을 때,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사람의 삶만큼 가치가 있다. 만일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 나에게 나쁘다면, 굶주림에 시달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나쁜 것이다. 또 생계유지 이상의 더 좋은 삶의 질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선이라면, 그것은 우리 가족에게도 선이다. 철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제러미 벤담이 모든 사람은 하나로 간주되며, 어느 누구도 하나 이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어떤 것이 어떤 상황에서 옳다면, 그것은 적절히 유사한 어떤 상황에서도 옳다는 것이다. 칸트의 표현을 비리자면 다음과 같은 일반 원칙을 뜻한다.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 도움을 받는 사람은 이타주의자들의 배푸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타주의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남을 돕는 것이 어쩌다 보니 선행을 하는 사람도 돕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 자신을 돕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존문화는 도움을 주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 사이에 관계가 형성돠고, 그 관계가 진행됨에 따라 한쪽 또는 양쪽 모두 관계 자체의 지속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이는 사람들이 자원봉사나 국가보조에 의지하는 상황에서 가장 명백하게 드러나지만, 반대방향으로도 나타난다. 즉 돌보는 사람이 자신이 중요하고,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얻기 위해 피보호자를 필요로 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이타주의를 삶의 의미의 원천으로 보았을 때, 인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타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가치에 대한 주장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굶주림과 질병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좋은 삶을 누리는 상황이다. 남을 돕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믿음이 왜 오류일 수밖에 없는지 다양한 경로로 살펴보았다. 타인의 삶을  향상 시킨다는 이타주의가 추구하는 목적과 이타주의의 실천을 구별해야 한다. 이타주의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보는 것은 수단과 목적을 혼돈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남을 돕는 일이 인생에 목적의식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타주의에서 받는 좋은 느낌이 무엇인가를 암시한다는 점이다.

 

사람마다 다르므로 지나치게 일반화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이것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다양한 운명이라는 맥락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사소한 문제도 그 중요성이 부풀려진다.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어느 정도는 이 편협한 시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며, 우리가 돕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도 더 풍요롭게 만든다. 일부 사람들이 남을 돕는 것이 삶의 의미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염려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유의미한 인생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확실한 진실 때문이다. 이타주의는 삶의 의미의 원천은 아니지만, 유의미한 사람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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