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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퀘스천 (줄리언 바지니 지음, 문

천지간에 있는 더 많은 것들

삶이 종종 힘들다는 것은 뻔한 말이지만, 극소수 사람들에게 삶은 우리 상상보다 훨씬 끔찍하다. 우리가 거주하는 이 물리적 세계너머에 초월론적 실재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세상의 밖, 혹은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말이다. 그러한 세계가 앖다면 자연계 안에 있는 수많은 생명은 무의미한 고통, 그리고 희망의 부재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우리 하나하나에게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목적에 만족하리라고 그저 믿어버리면 " 나는 사실상 나는 인생의 목적을 알지못하며, 나는 그 문제를 신에게 맡겼고 때가 되면 신이 내게 알려주시길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신론자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볼 때 유신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가공의 존재에 얹어놓고 있는 셈이다. 신앙인의 입장이란 확신과 안정을 얻는 위치가 아니라, 불확실 하고 위험한 위치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신앙은 의도적으로 이성에 반하여 행동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합리적인 정당화의 요구를 피하려는 태도이다.  누군가가 경험에 반하는 무언가를 목격했다고 아무리 강하게 주장하더라도, 우리는 회의를 품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성은 의심을 품으라고 요구한다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따라 친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 대한 신앙의 시험이다. 아브라함은 두가지 층 위에서 시험 받는다. 첫째 그는 이삭을 희생시키라고 명령 하는 것이 정말 신인지, 악령이나 착란은 아닌지 가려내야 한다. 둘째 그는 이 목소리에 복종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이성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어떤 신도 그런 살인을 명령할리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런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옳지않다는 것도 자명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행동에 나섬으로써 신앙이 이성과는 별개로 때때로 이성에 반하여 작용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이것이 무신론자들이 신앙을 취하지 않는 이유이다.  신앙이란 이성적인 믿음과 틀림없는 사실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회피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성과 대조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고유한 성격을 잃게 된다. 그래서 신앙이 위험한 것이다.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유익한지 판단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고, 자신의 개인적 신념이나 타인의 증언을 믿겠다는 뜻이다. 신앙은 예배때는 상냥한 얼굴을 할 수 있으나, 다른 견해와 부딪힐 때는 위험한 모습이 될 수 있다. 신앙은 성전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을 박해하는 광신의 뿌리이다. 신앙의 신뢰성은 이성에 의해 뒷받침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념과 타인의 증언같이 진리추구에서 신뢰하기 힘든 수단에 의해 뒷받침 된다. 개인의 신념과 타인의 증언 같이 진리의 추구에서 신뢰하기 힘든 수단에 의해 뒷받침된다. 삶의 신앙을 지닌 사람은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신이 자기를 돌봐주리라는 안정감이 인생에서 의미와 목적을 탐색하는 작업을 포기하게 이끌수 있기 때문이다.

 

사후의 생에 대한 믿음의 근거는 오로지 신앙뿐이다. 합리적 논증에 필요한 내세가 존재한다는 증거와 타당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한때 육신에 머물다 떠나는 비물질적인 영혼이라는 설명보다는 육신에 더 밀접하게 매여 있는 존재라는 이론이 훨씬 더 그럴듯하다. 언어를 사용하고 읽고 듣고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육체를 가진 유성생물인 우리 존재가 지니고 있을, 특징 같지 않다는 말이다. 육체가 없는 영혼으로서의 생명은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생명과는 매우 다른 존재이며, 어떻게 내세가 현세의 지속일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만약 우리가 70년보다 훨씬 더 오래 산다면, 하나로 인식되는 삶을 산,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여러 인격이 연속해서 겹쳐진 다중인격체가 되지 않겠는가?  나를 둘러싼 많은 것이 변할테고 현재의 나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지금의 나와 200년후의 나 자신을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에서 표현했듯이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결국 언젠가는 인생의 마지막이 올것이라는 바로 그사실이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인생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한해야 하며, 유한한 인생이 의미를 가질수 있다면 이번 생 또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신의 의도와 설계가 무엇이든 우리 삶의 의미를 구축하는 일은 우리에게 달렸고, 신이 제시한 모델이 무엇인지 알수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선택도 우리 몫이다. 삶의 의미는 삶을 사는 것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확실한 약속이 모든 행위를 가치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통찰력있게 지적했듯이 '신앙의 길은 편하고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되고 불안하다'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삶을 구원해 줄 초월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견딜수 없어한다. 이런 생각 자체가 신앙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무신론자에게 신앙은 단지 인간적 나약함, 세상의 불쾌한 진실에 대면하지 못하는 무능, 환상속에서 피난처를 찾으려는 욕망의 표시일 뿐이다.

 

각각의 인간 삶을 단순히 저 너머의 어떤 목적에 쓰일 즉자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인 대자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현재 순간에 매여있는 동시에, 시간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삶의 의미가 미래에 온다고 가정된 생애뿐 아니라 이번 생애에서도 발견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G.W.F Hegel)에 의해 사용된, 즉자적(卽自的, an sich)과 대자적(對自的 für sich)이라는 말은 서로 대비적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자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자체로 있는'이어서, 주관적이고 감각적이고 고립적입니다. 따라서 고립적이고 오직 자기 자신에만 매몰되어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것이고, 동물적 태도와 수준이기도 합니다. 

 

대자적이란 것은 말 그대로  '무엇에 대해서' 또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주관적인 자기 자신까지도 거리를 두어 객관화시켜 반성하고, 관찰하고, 인식하는 경지를 의미하며 곧,  이성적인 경지이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본능만 있는 동물과 구분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단계도 즉자적인 존재와 대자적인 존재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자적 존재 (卽自的 存在)는 인식하는 주관에 대해서 아직 발현되지 않는 ‘잠재태’이고 또한 자기자신에에 대해 반성적 관계가 결여되었다는 뜻에서 ‘무자각태(無自覺態)’라는 의미도 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않고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즉자적 존재는 논리 전개의 가장 낮은 단계로, 대립이 아직 잠재되어 발전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대자적존재 (對自的 存在)는 즉자적 존재와 대립되는 개념인데, 예컨대 '아픔'이라는 느낌 자체만 있다면 본능적이고 즉자적 존재이지만, 그 '아픔'이라는 느낌을 대상화하여 생각할 수 있다면 반성적이고, 즉자적 존재되는 것입니다. 즉 대자적 존재는 즉자적 존재에서는 할 수 없었던 '자신을 대상화하고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높은 수준의 존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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