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과거를 돌아볼 때에만 이해할 수 있지만, 미래를 향해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쇠렌 키르케고르)
많은 사람이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절대가치의 상실이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비참한 세계로 이어질까 두려워한다. 가치있는 삶이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의 밑바닥에는 보통 목적이 없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라진다해도 세상은 무관심할 것이고, 자기가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돈을 벌고, 먹고, 마시고, 잠자고, 가끔 쉬기도 하는 생존하게 해주는 것말고는 다른 목적이 없는 활동들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행동에 더 높은 목적과 목표가 있다면, 삶에 의미가 생기리라고 믿고 싶어진다. 많은 부모들이 알고 있듯 대부분의 아이들은 기간과 정도는 다르지만, 왜라고 묻는 시기를 거친다. 아이들은 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이 왜 생기는지 알고 싶어한다. 이 때문에 이사야 벌린은 '철학자들을 끊임없이 어린애와 같은 질문을 하는 어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왜/왜냐하면'의 연속은 본질적으로 정당화의 연속이다. 레스토랑에 있는 웨이터, 요리사, 접시닦이, 지배인, 손님 등은 저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있으나'고 물어볼 때, 그 대답이 반드시 미래의 목표나 과거사에 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 유의미한 것이라면, 왜/왜냐하면의 연속이 무한히 미래로 이어져서 안 된다. 더 이상의 왜라는 물음이 부적절하고, 엉뚱하고, 말도 안되는 질문이 되는 종착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목적은 영원히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목적지향적인 사람들은 야망을 달성한 뒤에 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기분이 고양되어 일시적인 만족감에 젖지만, 추구해온 것을 모두 달성하고 나면, 어떤 것도 삶에 목적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코치인 톰랜드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슈퍼볼에서 지금 막 우승했다 해도, 아니 우승한 직후에 특히 더 언제나 다음 해가 기다리고 있다. 만일 승리는 전부가 아니라 유일한 것이라면, 그 유일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공허함이다. 무의미한 인생이라는 악몽일 뿐이다.’ 성취는 본질적으로 성공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은 너무도 빠르게 과거로 흘러 들어간다.
키르케고르는 '존재의 심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을 구분한다. 심미적 영역과 윤리적 영역은 모두 인생의 중요한 양상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독자적으로는 삶을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은 현재의 기분 뿐아니라, 추억과 계획을 갖고 긴 시간 지속하는 존재이다. 그저 순간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된 오랜 긴 시간에 걸쳐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심미적'이란 말은 예술이나 아름다움을 연상시키는 현대적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어 어원의 의미대로 감각적 경험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감각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심미적 존재이다. 그러나 지속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는 행각들을 계속 벌이며 피곤하고 공허해 한다. '순간은 항상 우리 손을 빠져나가기 때문에, 현재속에서만 살 수 있는 삶은 본질적으로 불만족스럽다'고 한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옳다. 현재는 붙잡을 수 없고,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과거가 된다.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심미적 측면이 이성적으로는 조화를 이룰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현재에 매여 있으므로, 삶의 의미 또한 현재에 매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시간을 가로질러 존재한다. 따라서 삶의 목표를 현재의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한 좁은 순간에 고정하면, 인간 삶의 지속적인 측면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셈이 된다.
자기가 선택한 삶을 정당화 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만년의 부와 가족에 근거해 자기주장을 한다. 그녀의 인생설계는 인생의 목적이 하나의 특정한 성취가 아니라, 바람직하고 지속되는 상태나 생활양식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한다. 호화로운 생활과 적당히 풍요로운 생활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인생은 더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포드 대신 재규어를 몬다든지 해서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미래의 부와 안락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삶의 즐거움을 너무 많이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사람은 미래의 삶이 현재보다 나아질 정도를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삶을 좀 더 낫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인생의 수년을 바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쏟고, 상대방에게 소홀해지고, 그러다 결국 위태로워지고 심지어 허물어지는 관계와 결혼이 얼마나 많은가?
다음에 (Next, Please)
항상 미래를 너무도 열망하여, 우리는
기대라는 나쁜 습관이 들었네.
무언인가가가 항상 다가오네, 날마다
우리는 말하네, 그날이 오면 (필립 라킨)
비록 금전적 압박이 개인의 행복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느냐 아니냐는 대체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달렸다. 물론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을 경우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로마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 외부의 무엇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당신의 판단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그 판단을 당장 없애버릴 힘이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의 현실성, 즉 우리의 좋고 싫음과 무관하게 세상이 그자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친구이자 연인인 훌륭한 배우자, 남부럽지 않게 풍족한 생활, 말썽 안피우고 착한 아이들, 활기와 성취감을 주는 직장, 재미있고 흥겹고 지적인 친구들과 즐기는 다양한 사교생활, 장기적인 해외여행 등등. 물론 이 희망의 나열을 보면 이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며, 또 가져야 한다는 거의 당연하다시피 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터무니 없이 높은 이상을 기준으로 잡으면, 자기 삶을 볼 때 언제나 실망할 수 밖에 없다. 배우자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꿈에 그리던 완벽한 연인이나 친구는 아닐 수 잇다. 당신의 아이들은 고집불퉁에 말썽을 달고 다니며 잘릴지도 모른다. 일은 고될 수도 있다. 해외여행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즐기는 즐거운 휴식이어야 하지만, 스트레스의 원천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불완전함을 견뎌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언젠가 미래에는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 미래에 아무 어려움도 걱정도 없는 삶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왜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 항상 미래의 '왜냐하면'이다. 만일 최종 목적이 어떤 성취, 곧 순간이라면 그것은 키에르케고르가 인간 본성의 심미적 부분이라고 한 측면만을 충족시킬 것이다. 순간들은 사라져 버린다. 인생의 목적이 순간에 매여 있다면, 인생의 목적도 사라져버릴 수 밖에 없다.
'빅 퀘스천 (줄리언 바지니 지음, 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하기만 하다면 (0) | 2015.06.04 |
---|---|
더 커다란 이익 (0) | 2015.06.04 |
도우러 왔습니다. (0) | 2015.06.03 |
천지간에 있는 더 많은 것들 (0) | 2015.06.02 |
청사진을 찾아 (0) | 2015.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