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명하신 버트런드 러셀경도 택시기사가 던진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인생의 의미’란 문제 역시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해야 할 문제라고 여겼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가치의 언어들이 실상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 감정적 판단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였다. 그런 판단에는 합리적 근거를 댈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도덕적 선이나 미적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보편화될 수 없는 주관적인 감정을 엉뚱하게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지만 의미란 말이 중요성을 뜻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때 인생의 의미란 말은 ‘인생은 왜 우리에게 중요하며, 또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란 물음과 등가이다. 그리고 이런 물음 자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너무 막연하며 구체적이지 않다. 이 질문은 단일 질문이 아니라, 여러 질문을 묶어 놓은 것이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있는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저 행복하게 살면 되는건가? 아니면 더 큰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인생인가? 등의 질문들을 한데 묶어놓은 복합질문이다.
나는 특별히 지혜롭지는 않지만 단지 선현들의 지혜를 짜 맞춤으로써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사견이다. 올바른 질문은 올바른 답만큼 중요하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당신의 탐색이 어디서 끝날지 알려주는 지도가 될 수는 없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있는가?’라는 의미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애매해서 두가지 서로 다른 대답을 불러온다. 한 가지 대답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게 된 원인을 설명한다. 이 대답은 과거 지향적이며 기원에 관한 것이다. 다른 대답은 우리 존재 목적을 설명한다. 이 대답은 미래 지향적이며 목적지에 관한 것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도록 만든 원인이 그것의 미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도로가 건설된 원인은 차가 다닐 수 있게 하려는 도로의 미래 목적이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 생명의 기원에 대해 크게 신비한 점은 없다. 두가지 이론, 창조론과 자연주의가 경쟁한다. 창조론에서는 의식적인 목적을 가진 초자연적 행위자가 인간생명의 기원이라고 본다. 자연주의 이론은 인간 생명이 지적설계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의 맹목적인 과정의 일부로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150억 년전 빅뱅에서 시작해 100억년후 태양계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원시 단세포 생명체가 출현한 시기는 비교적 최근이다. 이 생명체는 진화과정을 거친 끝에 단 60만 년전 호모사피엔스의 출현으로 그 정점에 도달한다. 만약 자연주의의 설명이 참이라면 인생이란 자연의 무의미하고 우연한 사건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걱정한다. 인간을 포함한 개별 유기체들이 DNA에 새겨진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생존기계이며, 개체 자신이 아니라 유전자의 생존보장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개별 인간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지닌 유전자들이 계속해서 생존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욕망이나 목표, 의식 등을 갖지도 않는다. 유전자는 그저 생존할 뿐이다. 유전자의 운반자인 유기체와 유기체를 둘러싼 환경에 영향을 행사하여 자신의 생존을 유도함으로써 말이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가시계 안에서 은하수는 작디작은 파편이고, 그 파편 속에서 자연계는 무한히 장은 얼룩이며, 그 얼룩속에서 지구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점 하나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약간 특이한 물리화학적 성질에 복잡한 구조를 가진 불순물이 섞인 탄소와 물로 구성된 작은 덩어리가 몇년 동안 기어다니다가 다시 분해되어 자신을 구성했던 원소들로 되돌아 간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기자신을 유럽 최초의 완전한 허무주의자라고 불렀고, 알베르 카뮈의 가장 유명한 사상은 인생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폴 사르트르는 불안, 홀로 남겨짐, 절망에 대해 말했다. 현대적 세계관에서는 초자연적인 것은 제거되며, 우주의 모든 의미는 탈색되었고, 인생은 목적 없는 것으로 남게 되었다. 모든 실존주의자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견이 인간 삶의 의미에 위기를 불어왔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도덕성이 우리 외부에 있는 무언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이 전복 되었을 때, 우리는 삶의 의미의 원천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종이칼의 비유로 설명한다. 종이칼이란 종일르 자르는 칼이다. 종이칼은 누군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라고 만들었으므로 정해진 본질이 있다. 반면에 돌조각 같은 날카로운 물건에는 정해진 본질이 없다. 비록 종이를 자르는데 사용될 수 있다 해도 그저 인간이 우연히 그런 용도를 발견할 것일 뿐이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연주의 이론이 참이라면 이러한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냥 널려있는 돌조각처럼 그저 존재할 뿐이다. 사르트르는 삶의 목적과 의미는 인간생명에 내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 낼 책임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실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보기에 우리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대신 어떻게 살고 또 살아야 하는지는 우리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나 외부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설계에 달린 것처럼 여기는 자기 기만에 안주하는 편이다.
포스트잇의 역사를 보면 붙였다 떼었다 하는 메모지에만 쓰이는 접착제는 3M의 한 과학자가 발명했다. 찬송가집 사이에 찾던 노래를 표시하기 위해 책갈피가 있으면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쓸모없어 보이던 그 접착제가 유용하다는 것을 결국 깨달았다. 오늘날 포스트잇은 모든 모든 곳에서 사용된다. 발명가의 의도나 아니라 중요한 것은 실제 용도와 목적이라는 점이다. 인생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창세기에서 우리가 듣는 이야기라고는 “신이 인간에게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기 1:28) 라고 했다는 것이 전부다. 많은 사람은 이 구절을 인간이 지구를 관리하고 보호할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왜 지구를 보살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인생이 의미를 갖게 해주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흔히 우리는 신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용어를 쓰자면 우리 각자는 자신에게 유의미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의식적 존재인 대자존재가 아니라, 타인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대상인 즉자존재가 되고 만다. 인간이 신을 섬기도록 창조 되었다는 관점은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한다는 관점에서 거부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신앙인은 자기만의 판단기준이 있다. 이들은 성서에서 제시하는 규칙이 자신의 삶을 더 이롭게 만들경우에만 그 규칙을 따른다. 그렇지 않은 구절들은 무시한다. 신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해 기대만큼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특정한 목적으로 만든 요금 징수소 건물은 도로가 무료로 바뀌면 목적이 없어진다. 최초의 목적이 영원한 목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최초의 목적이 없다고 해서 영원히 목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목적은 획득될 수도 없어질 수도 변경될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삶의 기원이 삶의 목적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는 이유이며, 또한 생명이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자연주의적 믿음이 인생에 목적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닌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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