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개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암탉과 달걀에 관한 문제와 같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 될 수 없다. 영국의 시인 던은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부분이며, 본토의 일부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하기 시작하여 우리를 단순히 생물학적인 단위로부터 사회적 단위로 변화시킨다. 역사의 혹은 역사 이전의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누구나 한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인류학자들은 흔히 원시인은 문명인보다 덜 개인적이며, 사회에 의해서 더 완전하게 형성된다고 말한다. 보다 단순한 사회가 더 균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회가 더 복잡하고, 더 발전한 사회에 비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그리고 사회가 그 기회를 제공하는 개인적인 기술과 직업이 훨씬 다양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심화되고 있는 개별화는 이러한 의미에서 발전한 근대사회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그것은 저 꼭대기에서 부터 밑바닥까지 그 사회의 모든 행위들을 파고든다.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며, 서로를 조건 짓는다. 사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복잡한 혹은 발전한 사회란, 개인들 상호간의 의존관계가 발전한 그리고 복잡한 형태를 취해온 사회이다.
스위스 역사가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은 제2부에 ‘개인의 발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개인숭배는 르네상스와 더불어 시작 되었고, 이전까지 오직 어느 한 종족, 주민, 집단, 가족 혹은 단체의 구성원으로서만 자신을 의식해 왔던 인간은 그 시기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개인이 되었으며,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했다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선언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는 개인 권리였다. 싸움은 추상적 개인과 추상적 사회 사이의 투쟁이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들 사이의 투쟁이며, 각각의 집단은 우리에게 유리한 사회정책은 추진하고 불리한 사회정책은 좌절시키려고 싸우는 것이다. 이제 하나의 거대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간의 잘못된 대립을 뜻하게 된다. 개인주의는 오늘날에 와서는 이익집단의 슬로건이 되어버렸고, 세계의 움직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역사가는 알다시피 한 사람의 개인이다. 다른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역시 사회적 현상으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대변자이다. 우리는 역사의 경로를 움직이는 행렬이라고 말한다. 역사가는 다만 그 행렬의 어느 부분에 끼어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또 하나의 돋보이지 않는 인물에 불과하다. 그 행렬이 -그리고 그것과 함께 역사가가- 움직여감에 따라, 새로운 광경과 새로운 시각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다. 그 행렬 속에서 그가 있는 그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위대한 역사는 현재 문제에 대한 통찰이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야를 밝혀주는 바로 그때 쓰여진다. 여러분은 역사가 자신이 연구에 들어가면서 가지게 되는 입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그 입장 자체는 어떤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교육자 자신이 반드시 교육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뇌하는 사람의 머리 자체가 세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목적은 다만 사회안에서 연구하고 있는 역사가가 그 사회를 자신의 연구에 얼마나 면밀하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있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단지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속에 있다. 19세기 영국의 역사가들은 역사의 과정이 진보의 원리를 증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역사가 우리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던 동안에는, 영국의 역사가들에게 역사는 충분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게 되자, 역사의 의미를 믿는 것은 하나의 이단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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