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가 베러클러프 교수는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비록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고해도 엄격히 말하면 결코 사실 그것이 아니라 널리 승인된 일련의 판단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액턴은 사망직후 발간된 ‘캠브리지 근대사’에서 '역사가에게 학자가 아니라 백과사전 편찬자가 되라'고 위협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고대의 신전 안에서 19세기의 문서가 발견되었다. 만일 여러분이 문서들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 한다면 그 무엇인가는 정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에 본격적으로 접근할 때, 이런 문서들 - 법령, 조약, 토지대장, 보고서, 공무상 통신문, 사신과 일기-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 어떤 문서도 고작 우리에게 그 문서의 작성자가 생각한 것을 - 그가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을, 그가 일어나야만 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나리라고 생각한 것을 혹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생각해주기를 원했던 것만을-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 모두는 역사가가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해독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실들과 문서들은 역사가에게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20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선언했는데, 그것은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해서 그리고 현재의 문제들에 비추어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요한 임무는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영국의 철학자이며 역사가인 콜링우드는 역사가가 연구하는 과거는 죽은 과거가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은 만일 역사가가 그것의 배후에 있었던 사유思惟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역사가에게는 죽은 것, 즉 의미없는 것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오크셔트 교수는 '역사란 역사가의 경험이다. 역사는 역사가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사를 서술하는 것만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비판은 간과되고 있는 몇가지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결코 순수한 것으로 다가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 항상 굴절된다. 그것이 어떤 배경하에서 쓰였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읽을 때에만 독자들은그것이 완전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대체로 역사가는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사실들을 낚아올릴 것이다. 역사는 해석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더욱 상식적인 것으로서 역사가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그들의 행위의 배후에 있는 생각을 상상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세번째로 우리는 오로지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망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도 그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인간의 존재 조건 때문에 그 시대에 얽매일 수 밖에 없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다.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올바른 관점인가라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각의 관점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에게 가능했던 유일한 관점이다. 어떤 산이 보는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 산은 객관적으로 전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무한한 형상을 가진다고 할 수 없다. 이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 매 한가지며, 역사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객관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역사가가 반드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눈을 통해서 자신이 연구하는 역사적 시대를 바라보아야 하고, 또 과거문제들을 과거의 문제들의 열쇠로서 연구해야만 한다면, 그는 사실에 관한 순전히 실용적인 견해에 빠져서 올바른 해석의 기준은 현재의어떤 목적에 대한 그 해석의 적합성이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이러한 가설에 따른다면, 역사의 사실은 무가 되고 해석이 전부가 된다.
역사가는 자신의 사료를 읽고 그의 노트를 사실로 채우는데에 오랜 준비시간을 보낸다. 읽기는 쓰기에 의해서 인도되고 지시되며 풍부해진다.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내가 찾고 있는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역사가는 그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어내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 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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