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종교의 세속화가 만나면 구원의 조건도 변한다. 세속적 성공과 종교적 구원 가능성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을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불렀다. 개신교는 사람들을 성공 지향적으로 만들수 있는 종교이고, 그 자체가 전통으로 부터의 혁신, 즉 종교적 성공을 지향하는 종교이다. 종교의 세속화가 더욱 진전되어 종교 자체가 문화로 용해되어 버린 나라, 그곳이 주커먼이 목격한 덴마크와 스웨덴이다. 종교가 문화로 분해되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린 나라, 그래서 종교를 믿는다 것 자체가 희한한 사례에 속할 정도로 극단적인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는 나라인 덴마크와 스웨덴을 주커먼은 은유적으로 신이 없는 나라라 칭했다. 신이 없는 나라에서 종교는 그저 전통이 된다.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도 종교는 그랬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그들의 문화와 관련된 일이다. 세속화는 두가지 형태로 극단화 될 수 있다. 한 형태는 덴마크와 스웨덴 처럼 종교가 문화로 용해되어 신을 믿지않으면서도, 종교의 전통이 문화 전통과 관습으로 살아있는 경우이다. 또 다른 형태는 종교가 자본주의로 용해되는 것이다. 종교의 전제는 근심이다.
근심, 걱정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은 종교적 설득에 무덤덤하다. 사춘기 시절 우리는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묻기 시작했지만, 호구지책의 의무에서 잠시 면제되어 있는 사춘기 소년과 소녀들에게 산다는 것은 철학적 문제이지 현실적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어린시절 추상적 단어로만 다가왔던 삶의 고뇌와 번민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종교는 사람들의 걱정을 건드리고 걱정을 대신해 구원을 약속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현실적 걱정은 많은 경우 자본주의 법칙에서 유래하는데, 걱정의 원천인 자본주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자본주의적 구원을 약속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일종의 종교기능을 한다. 종교에서 인간의 구원이 신에게 달렸다면 종교가 된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돈에 의해 구원된다는 차이만 있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죄를 짓고 있음과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는 종교를 자신의 법칙 속으로 흡수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종교를 집어삼켜 종교를 타락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왕성한 식욕으로 종교를 소화시킨 자본주의는 종교가 잡아막힌 시대의 유일한 종교로 등극한다. 자본주의가 종교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신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