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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선진국, 군중

세상에는 어려운 일들이 참으로 많지만 굳이 그중 하나만 꼽아보자면, 외국여행 다녀온 사람 입 막기도 빠질수 없다. 사람들은 그곳을 그 안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그곳에 관한 선입견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곳에 갔던 사람들이 쓴 여행기를 통해 우리는 가보지 않고도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니, 독일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쾌활하니 등등의 판단을 내린다. 그리고 그 판단을 믿는다 . 미국 그리고 유럽을 다녀온 후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은 우리에게 서양을 들여다 보는 안경을 씌워준다. 그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시계는 개화의 등급에 따라 수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유견문시시콜콜 설명되어 있는 서양에 있다는 개화국의 정치제도, 사회제도, 심지어 옷 입는 풍습과 테이블예법 등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느 역사 여행 안내책자에서나 얻을 수 있는 별것 아닌 정보들이다. 서유견문을 우리 시대의 우리의 말로 옮겨놓으면 선진국 탐방이다.

 

 서양을 다녀왔기에 전문가가 될 수 있고, 사회지도층이 될 수 있는 이른바 유학생의 전성시대는 서유견문과 함께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서양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그 사람은 귀국 즉시 최고의 전문가 대접을 받고 교수라는 직책을 얻어 사회지도층으로 쉽게 편입되었다. 소위 사회지도층은 서양이라는 본래 모호한 지리적 개념을 우리가 있는 이곳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둔갑시킨다그들은 서양을 슬며시 선진국이라는 기호로 환치하고, 우리에게는 열등감을 불어넣고,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성장 또 성장이 필요하다는 해법을 난데없이 제시한다. 성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탄압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독재자의 심성으로 성장주의는 근거없는 우월감으로 변신한다. 선진국 타령은 노동조합이 생존권을 지키겠다는 주장, 요구, 모두를 잠재우는 만병통치약  ‘선진국이 될 것이냐, 여기서 주저앉을 것이냐’라는 협박성 구호이다이 협박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은 나라와 나라의 수평적 관계 따위는 아예 상상 하지도 못한다. 수직적 관계만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사람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 앞에선 필요 이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뒤에 있다고 생각하면 근거없이 깔보기 일쑤다.

 

어떤 주제든 상관없이 ‘미국에서는 ....’ 이나 ‘선진국에서는요’ 를 들먹여야만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할 있는 유아적 사고방식이 전문가의 식견으로 둔갑하고,  미디어는 정체불명의 유령기호인 선진국을 들먹이며, 외국에 대한 열패감을 조장하느라 바쁘다.  외국학자는 모두 한국에 오면 석학 대접을 받는다. 그 석학 앞에서 졸지에 한국 학자들은 학생으로 변신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해 질문하고,  원본을 찾아 아이들이 모두 떠난 아파트 단지에는 기러기 아빠만 가득한 스릴러코미디가 반복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윤에 눈이 밝은 사람은 시장개척을 위해 외국여행을 좋아한다. 상인에게 외국은 매력적인 곳이다. 외국의 낯섦은 그들을 두렵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자극한다. 슬프게도 우리의 여행은 선진국에서 주눅들고, 후진국에선 선진국에서 주눅들었던 감정을 보상받기 위해 돈지랄을 떠는 진자운동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군중은 개인의 특성을 먹어 치우는 괴물이다. 군중은 정치적으로 열광하는 성인들의 떼이다. 스타에 열광하는 청소년들은 세상이 말세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느낌은 그저 기우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열광하는 성인들이 군중을 형성하면 불길한 느낌은 기우에 그치지 않는다.  군중은 때로 악몽을 사실로 만들기도 한다. 구스타브 르 봉은 군중이 개성을 먹어 치운다고 생각했다. 의식을 지닌 인격체는 사라지고, 개인들의 감정과 생각은 전부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일시적이긴 하지만,  매우 명확한 특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집합적 영혼이 구성된다. 군중은 재산 수준과 상관없고, 학벌과도 관계없다.  개성을 용해시키고, 지적인 능력을 저하시키는 군중 현상은 교양의 수준과 상관없이 나타난다. 군중은 정서를 공유하고 행동도 통일한다. 군중은 놀라운 힘으로 서로의 차이를 무력화한다. 예비군복만 입으면 예비군이라는 군중으로 변한다.

 

숭배 대상이 자신의 기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호감은 순간 반감으로 바뀌고, 숭배의 감정은 증오로 갈아탄다.  군중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군중의 행동은 합리적이지도 않다. 군중은 단순하다.  군중은 쉽게 물든다. 군중을 기획하는 사람들은 군중은 비난의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막아주고 있는 총알받이에 가깝다. 군중은 비난받을 짓을 하지 않을 때 철저한 무관심의 대상이지만,  무관심할 수 없을 정도로 군중의 움직임이 격해지면 군중을 문제 삼는다.  군중은 동네북이 된다. 외부에서만 보면 시위대는 폭도에 가깝다. 시위대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시위대의 본뜻을 알아채지 못한다. 공중은 물리적인 광장에 모이지 않는다. 공중은 서로 흩어져 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무엇인가? 그 관계는 그들이 확신이나 열정의 동시성과 함께 그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의식, 즉 이런 관념이나 저런 의지를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순간에 공유하고 있다는 그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의식이다. 군중을 폄하하지 않고 기다리면, 군중속에서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이 찾아온다.  군중에서 공중이라는 꽃이 피는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 군중을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의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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