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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여론의 흥망성쇠

금연에 대한 의지가 강해도 의지보다 힘이 센 스트레스를 만나면 금연 시도는 순식간에 끝난다. 그렇기에 담배를 끊으려면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당분간 미디어를 끊는 게 현명하다.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을 보거나,  신문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입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렇다. 세상에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서기에 함량 미달인 사람이 너무 많다. 텔레비전에 출현하거나, 칼럼을 쓰는 어떤 오피니언 리더에게는 자신의 말과 글 속에서 세상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하고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싶은 나르시시즘의 욕구와 혹여 권력자의 눈에 들어 이른바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심신에 의해 지배된다.  많은 칼럼은 사실상 공직을 구한다는 이력서에 가깝기도 하다.  자신이 시대를 이끄는 리더라고 착각하는 정치인은 민심탐방을 구실로 시장에 나서고 기차역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지만, 여론과 정치는 대부분 어긋난다.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는 관심없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자기의 생각이 모세혈관을 타고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기를 원한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곳에선 위대한 개인의 의견은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인 여론 따위는 있을 수 없다. 파시스트 독재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신자유주의적 독재자는 경제적 효율성을 구실로 삼는다는 점은 다르지만, 여론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에 따라 법을 만들고 정치를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여론은 국가가 개인에게 강요한 의견이 아니다. 여론은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의견의 충돌이 숙성을 통해 조율되는 지혜와 심지어 소수자의 의견을 경청한 후 다수결의 폭력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마저 담겨있다.

 

사회를 인간의 신체에 비유해 다소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피가 원활하게 만들어지고 순환될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되듯,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의견의 교환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여론기관이 아니라, 이윤기관이 되어버린 기관이 된 언론은 여론의 순환을 막는 하나의 콜레스테롤이다. 언론권력의 최대 관심사는 여론 관리를 통한 이윤창출이다.  어리석은 공적 국가권력이 여론을 통제하려 한다면, 탐욕스런 언론권력은 자칭 오피니언 리더를 내세워 여론을 관리하는 교묘한 방법을 선택한다. 여론에 관심이 없는 정치권력이 언론권력과 합체되면, 여론의 정치반영은 불가능해진다. 홍보의 본질이 연출된 여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홍보는 사적 개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신장개업한 중국집이 평판을 얻기 위해 홍보전단지를 만들 때,  중국집 주인은 소비자라는 사적 개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셈이다.  국가가 광고에 쏟아붓는 돈의 규모가 커지다면, 국 가는 홍보를 구실로 여론을 연출하고 싶은 강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국가의 주요시책이 모두 홍보라는 이름으로 공익 광고화 되는 사회에선 여론의 활용조차도 사적 기업의 마케팅 조사를 닮아간다.

 

촘스키와 허먼의 '여론조작'은 언론권력에 의한 공론장의 희생을 기리는 장송곡이자 언론권력에 의한 공론장 살해사건 보고서이기도 하다. 뉴스를 여과하는 장치들을 큰 항목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규모, 집중된 소유권, 소유자의 부, 거대 언론기업의 수익 지향성,

* 언론의 주요 수입원인 광고

* 정부, 기업 그리고 이들 일차적인 정보원이자 권력의 대리인들로부터 자금과 인정을 받는 전문가가  제공하는 정보에 대한 언론의 의존

* 언론을 훈육하는 역할을 하는 강력한 비난

* 국가적인 종교이자 통제 메커니즘으로서의 반공주의.이들 요소들은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보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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