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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지음)

역사, 기술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행복으로 기억하는 과거의 그 순간을 추억이라 한다. 아무리 생생한 기억이라해도 체험 따위야 사적인 수다의 소재일 뿐이지만,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기억은 거대한 효과를 낳는다. 역사라는 기억은 우리를 국민으로 만들어 주는 학교이다.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민족의 전통과 뿌리를 배웠다. 20세기가 낳은 독일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누구도 문제삼지 못했던 무거운 개념인 역사에 대한 중요한 의문을 던진다. 그는 역사가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 또한 지배하게 하는 장치로 전락했음을 알고 있다. 역사는 우리의 순진한 기대처럼 과거의 모든 기억이 집적되는 저장소가 아니다. 집합기억은 과거에 대한 모든 기억의 총합일 수 없다. 

 

역사라는 집합기억은 현재가 관장하는 선별의 문을 통과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역사는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다.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은 승리자다. 현재의 승리자에게 반대했거나 보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과거는 기억에서 멀어진다. 경제성장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성장이 역사가 진보했다는 증거임을 내세워, 진보의 이름으로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의 희생도, 법에 의한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도 외면 하지만 진보라는 구실에 가려 보이지 않던 파국에 눈 돌리는 벤야민은 구원의 시선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이 불안하다. 신문을 펼치면 집값이 걱정되고, 보험 광고를 들으면 건강이 염려된다. 고용의 안정성도 더 이상 보장되지 않고, 가족관계 조차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늘 번잡하다. 불확실한 환경속에 있기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에게 예측가능성은 분명 구원이다. 합리적인 지식은 계산에 근거한 예측을 이용해 우리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준다.

 

쓰나미 경보가 내려졌을 때 아무도 해안가로 가지 않는다. 지식과 기술이 우리를 재앙으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믿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현대의 상식이다우리의 싱식대로라면, 근대화된 사회는 안전해야 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홍수가 두려웠지만, 화산폭발과 같은 재앙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함없이 발생하지만, 전자파에 대한 걱정은 풍요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의 몫이다. 재앙으로 인한 불안은 지식의 부족과 기술부족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새로운 불안은 기술적 진보 때문에 발생한다.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의 주인공은 기술관료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합리적 사회의 부메랑 효과로 탄생한 위험이다.  위험은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먹고 자란다. 저발달 사회에는 원자력 발전소는 없다.  원자력 발전소는 기술의 선진국에서나 나타나는 기술합리화의 표상이다.  1978년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처음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근대화의 상징이자 선진국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과학입국의 신호였다.

 

위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통제와 예측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위험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처럼 보인다. 위험은 발생하고 난 후에야 가시화 된다. 방사능이 함유된 비를 맞고, 기준치 이하이지만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과학자들이 안전하다고 인증한 물을 마시는 일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우리의 일상이다. 위험이 현실화되었을 때 미디어는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다는 단골 결론을 내린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주무 부서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미디어의 보도를 보면서 사람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만, 인재 담론은 오히려 위험의 본질을 은폐한다. 위험은 더 깊은 곳에서 자란다. 위험의 생산자는 정신줄을 놓은 관리자의 태만도 설계상의 실수나 예측하지 못했던 돌발변수도 아니다. 위험은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리라 믿었던 무지가 아니라, 지식, 자연에 대한 불충분한 지배가 아니라, 완전한 지배에 인간이 좀처럼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산업시대에 확립된 규범과 객관적 제약의 체계에 따라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돌진하는 근대화의 논리속에서 잉태된다.

 

보험판매원이 우리에게 미래에 닥칠 각종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보험상품 소개 카탈로그를 슬쩍 내밀때, 위험으로 인한 공포감으로 순간 소름이 돋는다. 위험을 강조할 뿐 위험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알려주지 않는 주장은, 우리를 때로는 심리적 패닉으로, 염세주의로 이끈다. 하지만 진짜 패닉은 위험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위험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인식이 방해받을 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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