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되기는 IMF 관리체제 이후 상식과도 같은 목표이다. 부자되기는 소박하고, 상식적인 희망이다. 개인은 소박한 꿈을 따를 뿐이지만 부자되기가 유일한 상식이 되는 순간, 몰상식이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상식은 힘이 세다. 상식은 분명 양적 다수에 근거한 보편성이기 때문이다. 정책중심의 정당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정치평론가들이 한결같이 주장해도, 정치인들은 정책보다 상식을 이용하는 편이 양적 다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유리함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상식의 명령대로 살아간다. 지배적인 상식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과 행동속에 숨어 있다. 상식은 언어의 관습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서민은 보다 정확한 표현인 빈민, 저소득층이라는 단어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상식을 자극한다. 상식이 바람직함을 갖추면 양식이 된다. 상식을 이용하는 세력과 상식을 교정하려는 세력이 싸움을 벌일 때, 보통 상식을 이용하는 편이 승리한다. 상식은 상냥하고 어루만져주는 어투를 사용하지만, 양식은 공식적이고 엄격하고 훈계하는 말투를 사용한다.
상식이 나를 무조건 이해해 주는 연인행세를 한다면, 양식은 냉정한 심사위원과 같다. 상업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대중의 상식을 기막히게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면, 지식인과 진보주의는 상식을 대체할 양식을 훈계의 어투로 늘어놓는 능력만 갖고 있을 뿐이다. 감옥에 갇힌 그람시는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 생각한다. 대중적인 요소는 느낌인 반면 항상 앎이나 이해는 아니다. 이에 반해 지식인적 요소는 앎이지만 항상 이해는 아니며, 특히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 지식인의 오류는 이해나 심지어 느낌 및 열정 없이도 알수 있다고 믿는데 있다. 대중의 느낌을 장악하지 못하는 한 진보주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도 대중을 얻지 못한다. 앎은 지식과 이해와 느낌의 결합체이다. 이해되지 않는 지식,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는 어투로 말하는 지식은 그 자체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그러하듯이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 우리는 세상에 대해 말을 거는 다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이상한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목이 쉬도록 저주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은 양식을 전달하는 새로움 말투를 익힐 때 해소된다.
출퇴근길 인파로 꽉찬 지하철에는 품위나 우아함 따위는 들어설 틈이 없다. 저기 사람들 속에 갓난아이라도 되는 양 구찌가방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다른 승객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안간힘를 쓰고 있는 한 여지가 있다. 저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왜 이 지옥 같은 자하철을 탔단 말인가? 소비는 매우 실용적 행위다. 소비는 매우 능동적인 행동인듯 보여도 그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힘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남따라 쇼핑가기, 계획에도 없는 소비하기, 있어 보이려고 물건사기 등등이 일상에서 반복된다. 우리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도록 만들어진다. 반지하에 살면서도 골프라는 럭셔리한취미를 즐기는 남자, 손수 자동차를 몰지만 에쿠스만 고집하는 남자, 21년산 위스키를 맥주와 섞어 구정물 맛이 나는 폭탄주로 만들어 삼키는 남자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노르웨이 출신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벌이는 과도한 사치행각을 ‘과시적 소비’라 불렀다. 과시적 소비가 문화적 관습법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모든 사회계층이 과시적 소비의 영향권으로 편입된다. 각 계급의 구성원들은 자신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에서 유행하는 생활양식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생활양식으로 인정하고, 그러한 이상을 추구하는데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아무리 흉내내도 부자가 아닌 사람은 과시적 소비를 위한 럭셔리 상품의 유행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저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없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이 흉내내는 속도보다 저 높은 곳에서 만들어지는 유행의 스피드가 늘 더 빠르기 때문이다. 부자들만 진짜 위스키를 마시고 다른 사람들은 양주 흉내내는 싸구려 기타 제재주 마실 때는 괜찮다. 위스키가 대중화돼 부자들만 맛보던 위스키를 모두가 마시기 시작하자마자 부자들은 12년산 위스키를 찾고, 12년산 위스키를 흉내내면, 21년산이 등장한다. 채워지지 않는 흉내내기가 반복 되면, 저 높은 곳에 있는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명품은 자본주의가 승자에게 선물하는 훈장이다. 나카무라 우사기는 명품의 본질을 잘 간파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자본주의란 부자라는 영광의 골을 향해 맹렬히 싸우는 게임이다. 그리고 명품은 그 게임의 경품이다'. 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중산층은 럭셔리한 유행을 따라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부르주아와 평민의 공동의 연합전선은 이미 오래전에 붕괴되었다. 상류층이 아닌 사람은 사실 상류층이 사는 모습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길이 없다. 상류층의 과시적 소비는 대리인인 연예인을 통해 낮은 곳으로 흐른다. 아웃렛과 면세점은 중산층의 또 다른 탈출구이다. 그래서 과시적 소비가 중산층까지 지배하면, 공항면세점은 발디딜틈 없이 붐비고 교외 있는 명품 아울렛은 사람들을 불랙홀처럼 빨아들인다. 부러운 사람은 짝퉁에서 해결책을 찾는다. 유권자가 소비자가 되는 사회에서 소비주의는 개인의 무거운 선택을 가벼운 선택으로, 정치 투표장에서의 고민을 백화점에서의 고민으로, 정치적 권리인 자유를 경쟁하는 브랜드중 무엇을 고를 것인가의 자유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부자들의 불법 상속에 무관심해지고, 쇼핑몰에 습관적으로 북적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투표율은 낮아지고, 고객 상담실에 전화를 걸어 소비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공적인 일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줄어드는 법이다. 이번 주말에도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을 수집하러 차를 몰고 교통마비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웃렛으로 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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