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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전쟁 (하랄트 벨처 , 윤종석 옮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가? -대안 1(2)

기후온난화의 문제는 기술의 무분별 투입 때문에 빚어졌다.  그 때문에 그 문제를 또 다른 기술의 투입으로 조절하려는 모든 시도들 역시 같은 문제의 한 부분이자 동시에 그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이지 결코 해결책은 아니다. 서구가 이룩한 수준의 현대화를 나머지 지역으로까지 전지구적으로 확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잘못된 대안에 속하는 또 다른 질문은 기후 재앙과 환경 재앙으로 발생된 증가하는 난민들을 당분간 제3국에 임시 수용하거나, 바다에 익사하도록 그냥 놓아두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이다.  기후변화가 인간들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결국 농업, 목축, 어업, 과학 등과 같은 문화적 테크놀리지들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지각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생태적문제들은 그 자체가 편파적이지 않는 공정한 자연 문제가 아니라, 생태적문제들로 인해  그 지속이 위협받고 있는 오로지 인간문화의 문제다. 어떤 문화가 자원들의 체계적인 수탈에 기반경우, 그 문화가 장기적으로 지속유지하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이런 문화를 지속시켜야 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그 문화가 모범적이라 할 수 있을까?

 

노르웨이는 석유생산으로 증대된 국부를 비용이 많이 드는 인프라 건설이나 복지예산에 투자하지 않고, 후손들도  현재와 같은 복지를 누리도록 하는 투지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스위스는 대중교통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교통망을 채택했다. 에스토니아는 인터넷 무료접속 기본권으로 보장되고 있다.   이런 다양한 정치적 결정들에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이들 모두가 국가의 정체성과 관련된 정치적 지향점을 가리키고 있다.  노르웨이는 세대간 정의가 보장되는 사회에,  스위스는 평등한 이동성을 보장하는 사회에,  에스토니아는 평등한 커뮤니케이션보장하는 공화국 이념에 각각의 미래를 걸었다.  이것은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문화적 대처의 문제에서도 아주 의미있다고 본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희망하는지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사회속에서 우리는 미래에 어떻게 살고 싶은가? 이것은 문회적 질문인데,  왜냐하면 그런 질문은 누기 이런 사회에 소속되고, 그 사회에 참여하며, 물질적 자산들이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들과의 대결을 우리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참여적, 개방적 사회모델을 위한 전제,  그리고 미래적 잠재능력이 있는 사회의 전제는 한편으로는 서구국가들이 가용하고 있는 물질적 부이고, 그런 부를 국제적 관점에서 동원하는 분담 의무이다. 자기자신은 그 깊은 내면에서 반대방향으로 달리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조건의 파괴를 진행시키는 달리는 기차가 그 속도와 방향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문제들은 그런 문제들에 이르렀던 모범적 사고로는 풀릴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방향을 전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단 기차를 정지시켜야 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1965년  ‘ 억압적 관용’이라는 논문에서'  관용의 기능과 가치는 평등에 달려있다.  그 평등은 관용이 행사되는 사회에서 지배한다. 기술적으로 말하면 관용은 형평성 수준에 의존하는 변수다. 관용이 원칙적으로 권력 우위자들에게 유리하다.  '미래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구상은 -가령 '지금보다 더  나을거야' 라는 식의- 가망없는 구호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미래에 어떻게 살기를 희망하는가' 라는 물음은 민주주의적 과업이다. 국제적 차원의 전망에서도 또 최소한의 관심 정도는 불러일으킬 것이다 . 일상적 삶- 승용차 사용 줄이기와 대중교통 이용 등-에서 포기를 결정하지 않고, 자신이 좋다고 간주하는 사회변화에 문화적 참여를 통해 기여하려는 사람도 있다. 과학실행능력들 덕분에 사람들은 생존기회들의 변화를 선취할 수 있는 능력들을 갖추어 왔다.  그들의 지적능력 덕분에 이로부터 적절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아직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면, 절박하게 생각되어야 할 그런 참여와 문화가 필요하다. 기후변화는 근본적인 문화적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고, 낭비와 폭력의 축소는 인류에게 상실이 아닌 승리로 간주되는 그런 일대의 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