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서부를 강타하여 약 80억달러의 물적피해를 야기하면서 뉴올리언스를 거의 완전히 침몰시켰다. 2001년 10월 이런 대침수 시나리오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게재되었다. 수로가 붕괴 되어 도시면적 80%가 침수되었고, 전기는 완전히 나가 펌프로 퍼내지도 못하고, 도로가 침수 되어 구조대의 길이 막혔다. 홍수가 난 직후부터 약탈행위가 시작되었고 긴급피난처로 슈퍼볼 돔구장을 마련하자마자 수용인원을 초과헸고, 돔구장 주변에서 폭력사태가 증가했다. 당국은 전시상태를 선포했고 주지사 캐서린 블랑코는 약탈자를 사살할 수 있도록 주방위군에게 지시했다. 뉴올리언스 중앙역에는 임시감옥이 설치되었고, 총격전과 폭력사태, 상점약탈, 도둑질이 이어졌다. 6500명의 병력이 재난지역에 투입되고 나서야 상황이 진정되었다. 홍수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부유한 주민 대다수는 대피할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파괴된 도시에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홍수 위험의 무시에서부터 전혀 충분치 못한 피해 예방대처에 이르기까지 혼란이 일어나고, 이를 전혀 제압하지 못한 무능에서부터 치안당국의 극단적인 반응에 이르기 까지 허리케인 결과 측면에서의 사회적 불평들로부터 난민들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와 도시의 새로운 사회적 인구구성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적인 사건의 연관관계는 하나의 사회적 재난이상으로 더 광범위 하다.. 사실 자연재난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의미론적 게으름의 표시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결코 주체가 아니며 따라서 결국 파국을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물론 사람들에게 재난적인 사건들 즉 사회적 파장을 낳고, 그에 대한 기대와 극복능력을 넘어서는 그런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사회재난은 한 사회의 감춰진 이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재난은 생활과 생존의 기회들에서의 불평등을 보여준다. 불평등은 사회가 정상적으로 기능할 경우에는 제도적으로 흡수되고, 주거지역이나 노동영역에 따라 완충 되어 별로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재난은 폭력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행위 옵션으로 제시한다. 이 모든 것이 기존에 익숙했던 교류형식들이 붕괴된 순간에 분명해졌다.
재난적 사건에서는 한 사회의 예외적 비상사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는 잠복 되어있던 사회의 실존적 차원이 나타난다. 사회과학과 문화과학들은 정상성에만 고착되어 있고, 재난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기후변화는 사회과학과 문화의 대상으로 되어야 한다. 세계인구의 엄청난 부분이 미래의 점점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막화가 심화되고, 토양이 산성화 되고, 침식되어 많은 지역에서 생존의 기회들이 축소되고, 오존층의 확대, 어류의 남획, 강물의 오염과 호수의 육지화도 생존기회를 박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그 때문에 더 이상 자연재난이 아니다. 그 바닥에 깔린 과정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인간본성에 의한 것들이다. 그 결과들은 어쨌든 사회적 결과들이다. 사회적 결과들의 본질은 이런 희소한 자원들을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주 불가능한 지역들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과 이들이 자신들의 거주지를 침범하는 것을 막으려는 타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것의 본질은 파괴이다.
기후변화의 현상과 결과에 몰두하는 거의 모든 학문적 논란들이 자연과학적 연구들, 모델 계산 그리고 예측이라는 점이다. 사회과학분야는 배제되어 있는 듯하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분과학문을 통해 기후변화의 사회적 차원을 측정할 능력도 없고, 이것이 그들의 담당분야도 아니다. 모든 묵시론적인 사실들을 나열한 후에,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자연과학자들이 대체적으로 인간이 상황들을 창조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서로 다른 차원의 행동들이, 집단적 이성과 개인적 비이성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사회적 행위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등등 이런 것에 대해서 그들이 전혀 사고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를 물리학적 측면들에 전문화된 차원에 몰두하고 있지, 결국 사회차원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의 발생은 자연과학의 대상이지만, 그 결과 측면을 고려하면 사회과학의 대상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우리는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우리 자체의 배후에 누가 숨어있는지 모른다. '우리'라는 단어는 인류를 대변하지만, 인류는 행위자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물이다. 현실에서 수십억 명이나 되는 주체들이고, 그들은 매우 상이한 문화적 배경들과 아주 다른 경제적 기회들과 정치적으로 권력자원들을 가지고 복잡한 생존공동체들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 다국적 에너지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중국 시골농부 사이에는 사회적으로 구체화 될 수 있는 그 ' 어떤 우리'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회체계에서 서로 상이한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라는 단어 사용은 현실에 대한 집합적인 지각을 가정하고 있으나 이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특히 기후 온난화와 같은 전지구적 맥락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기후변화들의 결과들이 사람들마다 서로 상이하게 닥치기 때문이다. 손자들의 미래에 관련하여 한 부류의 사람들은 막연하게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의 자식들은 이미 죽어가고 있다.
환경운동의 오래된 테마들은 바다의 오염, 토양의 독성화, 생물 다양성의 감소, 원시림의 벌채와 화전 경작, 강물 유량 감소, 호수의 소멸 등에 대해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일차적으로 과거 30년 동안 변화되어온 것은 환경문제 자체가 아니라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이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기후변화로부터 기존자원의 돌이킬 수 없는 채굴과 생존공간의 지속적인 파괴를 거쳐 인구증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문제들이 사회적 문제들이다. 호수, 강 그리고 바다에서 열대우림이나, 사바나 지역에서 종의 다양성의 감소가 문제가 될 때마다 이것은 자연적인 문제가 아니다. 식물과 동물들은 자신의 생존조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아무 의심이 없으며, 그것들은 그저 죽어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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