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인 상황들속에서 인간들의 행태에 대한 결정적인 것은 이 상황들의 객관적인 조건들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지각과 그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이다. 비로소 해석이 최종 결론들로 이어지면, 이것이 또 다시 행위로 이어진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 완전히 비합리적이거나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게 보이는 행위들 조차도 그것을 수행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런 행위로 자기 자신이 심지어 상처를 입었다는 아주 의미 있는 것일 수가 있다. 인간들이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연구해 보면 비로소 왜 그들이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외부인의 시각에서 아주 엉뚱하게 보이는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서로 연결된 긴 행위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현대 사회들에서는, 개인의 행위의 결과로 야기하는 것과 그가 자신의 조절된 행위에 의거해 실제 책임질 수 있는 것 사이에서 하나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 일개 개인으로서는 원칙적으로 어렵다. 제도들은 그러한 관계를 만드는 것을 현대화하고 법제화하려고 한다.
책임의 사라짐이라는 문제는 사회적 현대화 과정들 자체에서 생긴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일정 정도 그러한 제도들의 지속적인 발전과 새로운 창조를 나타낸다. 책임이 권한성으로 변형되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동적으로 비-귀속성으로 변형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행위와 행위결과사이에 시간적 관계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사람들이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착된 무책임성이 기후변화와 더불어 발생하는 사회적 결과들과 해결가능성들이 어떻게 인지되느냐에 대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조차 할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해결책을을 우리는 과연 몇년안에 가능할 것이라고 여기는가? 18세기초반 조너선 스위프트는 '지상 주민들이 겪는 빈곤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획을 발전시켰다. " 증가하는 빈곤층,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경제적 비용, 형편에 맞춰 거둬들일 비용에 대한 통계적 데이터를 이용해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내 아이 하나에 여자아이 넷 정도면 충분할 것이므로, 남은 10만명이 한 살 정도 되면 왕국에서 지위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사가도록 경매에 붙이면 될 것이다." 대량 학살을 합리적, 과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통계적 자료들로써 살을 붙이고, 또 도덕적 언급으로 위장한 채, 스위프트는 도구적 이성이 모든 도덕을 부차적인 범주들로 축소시키는 미래의 상황을 미리 통찰하고 있는 셈이다.
인종청소 헹위가 있었던 지역에서도, 민주주의적 사회에서도, 근본적 해결책들이 하나의 옵션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살인적 과정들을 우리는 여전히 정상적 사태진행들로부터 일탈로 , 즉 예외적인 특별한 경우들이라고 쉽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너무 단순화 한 것이다. 20세기 사회적 파국들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사실은 인종청소와 민족말살이 현대성의 골목길로부터의 일탈 현상이 아니라, 현대적인 사회발전들이 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 그 자체로서 생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회적 과정들은 문명으로부터의 단절이거나, 야만의 귀한으로 이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생산하려는 현대적 시도의 결과물로 사람들이 감성적으로 느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현대적 시도들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V-2로켓이나, Me-262제트기 생산을 위해 거대한 지하시설을 건립할 때, 이에 강제 동원된 인력들이 너무나도 착취를 당해 그들의 평균적인 기대수명은 강제노동 수용소에 도착한 후 불과 몇개월 이었다. 노동은 착취이자 살해 도구로 동시에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인의 이러한 기업경영적 형태는 가령 1941년부터 러시아 점령지구내 전방지역에서 발생했던 것과 같이, 심지어 대량학살을 조직화 하는 데 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인이 노동으로 인지됨으로써 살인의 정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다른 경영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노동- 다시말해 체계적인 대량살인에 가담하는 것- 에 대해 그 전체적 연관관계를 인지하기에 앞서 근원적인 문제해결에 대한 필요성이다. 이러한 과정은 노동분업적으로 이루어져 결국 아무도 스스로를 살인자라고 느끼지 않게 된다. 나치즘 민족학살 전쟁에서 살인지들은 자신의 행위를 노동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그들 나름대로의 시각에서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있는 지시들- 다시 말해서 나는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살인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살인한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인한다. 등등 - 을 만들어 내는 능력은 심리학적 모드이다. 그런 것 때문에 사람들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을 하고 심지어 그 어떤 일이라도 행하도록 하는 능력을 갖춘다.
인간들은 하나의 사회적 우주에 존재하며, 그 때문에 실제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인간 행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자연적이거나, 특별한 방식으로 설정된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특정한 형태를 지니고 있고,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에서 발생한다. 나치가 살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이 ' 세계 지배를 위한 단일 인종적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더 높은 목적 때문이다. 가스실과 살충제를 살인도구로 도입한 이래 본래적 의미의 처형이, 행위자에 의한 직접적인 폭력행사 없이 완수 되었다.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사례들은 인간들이 여전히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으로부터 일탈되어 있고, 가장 반인간적인 이론들과 규정들, 결론들과 행위들조차도 의미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그것들과 친숙한 그런 구상들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4년 르완다에서 대다수 주민들이 단 3주 만에 투치족 80만명을 죽이는 것을 의미있다고 간주했다. 인간들은 타인들이 자신들에게 문제거리로 보이면, 그들을 죽이는 것이 문제해결의 방편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현대주의적 맹신이며, 이 맹신은 생각만해도 소름끼친다. 한스 알베르트에 의하면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무기를 생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많은 경우에 문제해결의 도구를 생산하는 것보다 더 쓸모있는 것으로 여겨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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