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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처럼 질문하라(크리스토퍼 디

논쟁자들1

소크라테스가 서구 사상가들 중 가장 골칫거리 논쟁자들 중 한 사람이다. 우리가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을 개발한 사람이 그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고 알려진 이 방법은 사람들의 믿음, 그들이 확실하게 믿는 믿음에 대해 의문을던지고 꼬치꼬치 캐묻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문답법이라는 것을 통해 자기는 온갖 아이디어, 개념, 문제 등에 도무지 아는 게 없는 체하여 사람들이 자기 행동과 믿음을 더 명확하게 설명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소크라테스와 이야기 하다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곧 자기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자기 잘못이나 실수를 잘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을 넘어 그들의 무지까지 드러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질문에 점점 더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데 매우 능했다. 그의 문답법은 사랑, 아름다움, 소유 같은 모든 특정 행동의 핵심요소들에 대한 탐색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낮게 평가하고 자기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는 그의 방식을 매우 싫어했다.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행동안에서 안전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등에에 비유했다. 게으른 말, 즉 사회를 깨어있게 하기 위해 그 주위를 맴돌며 성가시게 구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유사 이래 우리가 자신과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확신한 때가 있었던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믿으며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더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없던 때가 있었던가? 사회를 이루고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믿음을 성찰하는데 게으름을 피울 때가 많다. 무관심 때문이든 사회 시스템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의문시 되는 일이 거의 없고, 사회에서 인정하는 행동유형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든, 아니면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자신을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이든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회가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다고 주입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비판적으로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 골칫거리 논쟁자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사회에 유용한 존재가 되려면 시림들틈에서 비판적으로 진지하게 사고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연계는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고, 세금내고, 배설하고, 섹스하고, 기족을 부양하는 등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우리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이 상식적인 세계를 이해한 것이 결국 과학을 발전 시켰고, 과학의 발전은 자연계에 대한 한층 일관되고 포괄적인 이해를 낳았다.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사람이 없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고민했다.  “ ... 내가 이 사람보다 현명하다. 우리 둘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자기가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 데도 말이다. 반면 나는 내가 모를 때는 모른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내가 그 사람보다 현명한 것 같고,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래서 그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미움을 산 것이구나.”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회의론자의 의미는 의심하는 자가 아니다, 원래 그리스어 'skeptikos'는 캐묻기를 좋아하는자, 즉 탐구자라는 의미이다. 회의주의라는 말은 창시자 피론의 이름을 따 피론주의 라고 불렀다. 현실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사물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피론은 우리의 모든 감각 즉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과 그가 살던 시대에 유행하던 온갖 초자연이론이 사물의 본질 또는 성질을 표현할 때는 서로 모순적이라고 보았다.  꿀을 맛보았을 때 느끼는 달콤함은 꿀의 달콤함인가, 우리 안에 있는 달콤함인가? 어떤 음식은 달콤한 향이 나지만 실제로는 쓴 맛이 난다. 어떤 사물이 부드러워 보여도 실제로 만지면 거칠다.

 

우리는 우리 주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피론은 세계가 인식되고, 해석되고, 다루어지는 방식에 인간이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우리가 에포케 epoche 즉 동의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의 본질을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어느 것이나 그럴듯하거나 그 반대일 가능성이 반반이므로 판단을 미루는 것이다.  피론은 자신의 무지를 분명히 깨닫고, 현실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부족을 인정했다. 무지를 깨달음으로써 말을 세계의 초자연적 본질에 대해서 말을 아꼈다. 우리의 행복과 관련하여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무심한 태도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믿음과 거리두기 또는 에포케는 피론에게 마음이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입증하지 못할 게 뻔한 초자연적인 문제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을 자제하면서 현실의 본질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할 필요 없이 자기 경험의 한가운데서 평화롭게 사는데 만족했다. 살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에 너무 무관심한 나머지 그것을 등한시 한 것도 아니었다.

 

무지의 두가지 유형의 차이는 한쪽은 초자연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무지를 성찰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확실한 답을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겉핥기에 지나지 않다것을 인식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 굴때가 많다. 어리석게 구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도록 성가시게 따져 물을수 있어야 한다.  무지를 깨닫고 나면 자신에게 현실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지식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피론 이후 인기를 얻게 된 회의와 탐구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상의 겉모습과 본질 사이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합리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해결할 없는 초자연적인 문제와 일상적인 현실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상식의 문제를 구분하는 것도 중요해졌다. 회의주의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아르케실라오스이다. 그는 "... 우리는 누가 졍말 현명하고 누가 정말 어리석은지 확신할 수 없고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궁극적 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앞에 있는 것이 진짜 확실한것인지 보기에만 확실한 것인지 단언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게념들에 관해서 에포케(동의하거나 믿는 것을 보류)해야하고,

그것의 진실성에 대해 판단을 정지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인정하는 진실성을 판단해줄 현실 측정자가 없다. 초자연주의자들은 이유야 어떻든 자기가 황금컵을 쥐고 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 자기 주장이 진실이라고 말한다.  초자연부의자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 주장의 타당성 또는 신빙성을 가늠할 현실 측정자가 없어서 생기는 어쩔수 없는 무지를 이용한다. 수많은 초자연주의자가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자기 대답이 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단지 다른 사람이 이 진실을 보지 못할 뿐인데 그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무지를 깨닫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지식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겸손해질 수 있다는 가치가 있다겸손함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든 모든 장벽을 뚫고 길을 낸다.  소크라테스와 고대 회의론자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우리가 세계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전체적인 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