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자연과의 조화1

자연과의 조화라는 말을 사람들은 낭만주의 녹색운동식 미사여구로 취부한다. 자연에 감성적인 느낌을 덧칠 하려는 성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때로는 그것이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더 중요한 요구를 무시해버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현대 파리의 시민들이 농경지로 가려면 6시간은 걸어야 할 것이다. 도시병이라고 하는 전형적인 현대의 감정과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갈망의 원천이 있다. 그렇다고 도시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러나 도시가 시골 환경과 단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정은 고대 그리스어 필리아philia(친구나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필리아는 다정한 관계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다. 아버지, 배우자, 스승, 함께 일하는 동료가 모두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친구일 수 있다. 가족이나 여타의 인격적인 관계는 구조와 중요도,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그러한 관계 중 일부는 좋은 삶을 어떤 식으로 보든 확실히 본질적인 것들이다.

 

아무리 다른 좋은 일이 있다한들 친구없이 살기를 선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참된 우정은 각자가 상대방의 좋음을 자신의 것으로 포용하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공동선을 만들어 갈 수 있을 때 존재한다. 그것은 덕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서로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이다. 우리는 자기 이익에 입각한 개인들의 동맹이 국가이며, 우정은 정치적 의미가 전혀 없는 순수하게 사적인 관계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가 볼 때 우정없는 국가는 전혀 국가라 볼 수 없다. 국가는 서로간의 범죄를 예방하고, 교환을 촉진하기 위해 세워진 단순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완벽하고 자기 충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족과 마을의 연합이며, 이러한 삶이야말로 행복하고 명예로운 삶인 것이다.

 

우정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좋음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경제적인 선결요건들이 있다. 기근에 시달리는 시대에는 사회적 신뢰가 꽃을 피울 수 없다. 지속적인 구조조정, 인원감축, 외주 등으로 특정 지워지는 경제에서 깊고 장기적인 인간관계는 형성되기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자신에게 활력을 주는 사람이라는 특정한 용도로 만나는 친구는 결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 효용 친구이다. 

 

여가는 휴식 혹은 이완과 동의어다. 더 오래된 여가 개념은 그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당한 활동의 특수한 한 형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가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기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것은 여가라기보다는 휴식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여가가 왜 기본재인가? 여가없는 삶, 모든 것을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만 행하는 삶은 정말 공허하다. 그것은 무언가를 준비하면서 보낸 삶일 뿐, 실제로 삶 그 자체를 위해 영위된 적이 한번도 없는 삶이다. 여가는 높은 수준의 사유와 문화의 원천이다.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세계를 참되게 바라볼 수 있는 삶의 고유한 특성과 윤곽을 관조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말에서 여가라는 말인 스콜레schole는 순간적인 통찰, 삶을 즐기는 것, 일을 하다가 잠시 쉼으로써 다음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준비등의 의미다. 어떤 휴양이든 능동적인 참여와 숙련이필요하다. 공원에서 축구를 하거나, 자기가 필요한 가구를 스스로 만들고 장식하고, 친구들과 기타를 치는 일, 이러한 일은 모두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 여가다. 여가의 경제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고역, 고통의 감소이다.  고통이란 돈을 받고 행하는 노동만이 아니라, 출퇴근과 가사노동 등 필수적인 활동을 모두 포함하는 범주로서, 열성적인 작가나 장인의 노동처럼 그 자체를 위해 행하는 유급노동은 일차적으로 배제된다.

 

우리의 일상에서 고역이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잠자고 쉴 시간 밖에 없게된다면, 여가는 불가능하다. 현명하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단지 시간만이 아니라 몰입과 취향도 있어야 한다. 오래된 생활속 예술인 대화, 춤, 음악 활동이 가장 필요하게된 바로 지금 점차 줄어들고 있다. 생산을 극대화 하도록 구조화된 경제는, 자발적인 형태의 여가보다는 기성품이 된 여가를 만들어 내는 쪽으로 기운다. 기본재를 모두 실현하는 삶이 좋은 삶이다. 실현이란 모호한 개념이다. 얼마나 많은 존중을 베풀면 존중이 실현되었다 할 수 있는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생계비를 버는 노동을 통해 얻는 존중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그러한 딜레마에 맞닥뜨리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을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나 부수적인 으로 종속시키는 ‘좋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기본재가 여러 개라는 점에서부터 어느 하나가 부족할 경우 여분의 다른 것들로도 벌충될 수 없다는 중대한 결과가 발생한다. 유로화가 부족하더라도 여분의 달러가 이를 보충해줄 수 있는 것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우정이나 여가가 없는 삶은 특별한 뭔가가 빠져있으므로, 존경이나 다른 좋음이 아무리 많아도 이를 보완해 주지는 못한다한 분야에서 아무리 성공했다한들 건강, 여가, 개성 등을 결여한 삶이라면, 그가 좋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건강과 우정은 다분히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이에 비해 개성, 존중, 여가는 부분적으로 개별 주체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는 국가의 제1임무가 모든 국민의 좋은 삶을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달성된 다음에라야 국가는 아름다움, 권력, 장엄함을 추구할 완전한 자격이 있다.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로버트 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한 경쟁에서 벗어나기1  (0) 2014.02.03
자연과의 조화2  (0) 2014.01.31
좋은 삶의 구성요소들2  (0) 2014.01.28
좋은 삶의 구성요소들1  (0) 2014.01.26
성장의 한계2  (0) 2014.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