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온난화라는 재난을 면하려면 경제성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몰아세운다.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면 성장을 포기해야한다는 환경주의자들의 요구가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예술사가인 케네스 클라크는 근사한 돔과 장식을 선호하던 독일 로코코 양식이 공포가 아니라, 기쁨을 통해 설득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극단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항상 공포에 의존하곤 했다. 우리는 기쁨에 의거해 사람들을 설득하기를 원한다. 죄책감이나 처벌, 공포 때문이 아니라 희망에 따라 좋은 삶을 추구하는 비전이 그것이다. 맬더스가 표현했듯이 인구의 힘은 인간이 먹고 살 것을 만들어 내는 지구의 힘에 비해 너무나 우세하기 때문에 인류는 어떤 형태로든 때이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19세기 거의 모든 유럽국가들은 농업 생산성의 증가. 출산율 저하, 신세계로의 대규모 이민 등의 복합적인 경로를 통해 맬더스가 예견한 유령을 피했다. 그 이후 이 유령은 다시 등장했다.
도넬라 메도즈 등이 쓴 ‘성장의 한계’ 는 20세기말에 세계인구가 70억에 이를 것이며, 그로 인해 곡물, 천연가스, 구리, 알루미늄, 금의 부족사태가 빚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들의 예상은 기우로 판명났다. 인구는 증가했지만, 수확량을 대폭 끌어올린 농업에서 녹색혁명은 대량 기아사태라는 위협을 물리쳤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짐에 따라 지구는 따뜻해진다. 이것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라 여기는 인간에 활동에 의한 온실효과이다. 지구온난화는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과거 맬더스적인 공포와는 다른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결과 홍수, 가뭄, 전염병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되고 있다. 풍족한 사회가 현명한 장기 목표가 아니지만 이것은 윤리적인 목표일 뿐 과학적 사실에서 도출된 결론은 아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성장이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추가적 가정위에서 뿐인데, 이 가정은 대개 인지되지 않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부터 성장 축소의 필요성을 도출하는 논의는 전형적으로 공리주의적인 형태를 띤다. 미래에 발생할 훨씬 더 큰 고통을 예방하려면 현재의 고통을 어느 정도 감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측은 위험요소가 많은 일이다. 기술은 지구온난화 비용을 평가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홍수, 가뭄, 질병 등에 얼마나 잘 대응하는냐가 여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기술변화는 원칙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지구 온난화의 위험이 실재하는 것은 맞지만, 전염병과 전쟁, 기타 다른 재앙에 따른 위험과 동일한 척도위에서 비교할수 있는 종류의 위험이다. 기후문제에 대해 급진주의자들의 요구처럼 모든 노력과 자원을 집중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의 행복을 더 중시한다. 사람은 현재 중심적이다. 환경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미래의 복지에 할인을 적용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표명한다. 그들은 내일 먹을 수 있는 잼의 가치는, 오늘 먹을 수 있는 잼의 가치보다 실제로 적다고 규정한다. 미래 세대는 우리보다 더 풍족할 것이고, 지구온난화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에게는 우리 아이들의 복지가 손자들의 복지보다 더 중요하며, 손자의 복지는 증손자의 복지보다 더 중요하다. “내 가족은 다음에 지구야 멸망하든 말든” 이라는 루이 15세의 말까지 끌어댈 필요는 없다. 다만 태어나지 않은 이들의 복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복지보다는 덜 중요하다. 지구온난화 공포가 근거가 없다고 판단나더라도, 기후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엄격한 태도를 정당화 할 새로운 논의를 찾을 것이다. 환경주의의 추정이 성립하든 무너지든,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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