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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죽음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인간에게도, 생애 단 한번은 완전한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한 생애 를 통해 오직 한번밖에 허용하지 않는 절정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죽음이다. 모든 사람의 시선을 붙잡고 단 한번의 눈 맞춤, 단 한마디의 대화를 안타까운 애원으로 빌어 보는 긴장의 순간, 그것도 죽음이다.절정은 서서히 가족의 울음이 커지면서 시작된다. 주인공이 말문을 닫고 눈을 감고, 두손을 저으면서 입을 열 듯 말 듯 괴로운 몸놀림을 할 때, 가족의 울음은 더 진하게 몰아친다. 그 깊은 오열이 잦아지는가 싶을 때, 주인공은 이미 온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두 손을 늘어뜨리고 마지막 입을 여는가 하다가 힘겹게 닫고, 드디어 고개를 한 순간 툭 떨어뜨리고 따르륵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순간, 가족의 통곡이 온 집안을 메운다. 절정은 그렇게 간단히 끝난다.

 

죽음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상식은 허영이거나 사치였다. 죽음은 우리가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그런 여유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죽음은 인간에게 너그러운 것이 아니다. 죽음은 도저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성직자들이나 학자들이 죽음에 대한 담론으로 긴긴 시간을 끌어가고 있다해도,  그것이 한 사람 죽어가는 일에 무슨 도움이 된다 말인가. 한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가족을 바로 눈 앞에 놓고 숨을 거둬야만 하는, 그 절박한 시간에 죽음에 관한 담론이나 논의가 무슨 부탬이 된다 말인가?

 

죽음은 이미 동반을 거절한 것이고, 그 누구도 동행 할 수 없는 완전히 홀로 떠남이라는 아주 단순한 명제다. 제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동반을 거절하고 ,그 동반 거절에 동의해 버리고 이기적인, 참으로 이기적인 것이 죽음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가볍게 죽음을 이야기 해 왔다. 죽음을 보았는가? 죽음이 현실화되어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는가?  그 삶이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또는 남편일 때,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비극인가를, 그것이 얼마나 상상 할 수 없는 통절한 순간인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그저 끝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비어있는 것이다. 없다는 것, 그 사실 만이 그 현실을 설명해 준다. 죽음에는 찬사도 있을 수 없다. 죽음을 철학으로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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