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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그 적들 (이나미 지음)

휴가, 술

고통과 좌절을 겪으면, 잠시만이라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서 멀어지기 위해 어딘가로 떠나버리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다. 떠날 형편이 못되면 모든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떠남은 낯선 세계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나를 만들고 경험한다는 면에서 인생의 큰 도약일 수 있다. 고향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길을 떠나는 행동은 자신의 미숙함과 이별하고, 진정한 독립적인 인간이 되는 일종의 영웅적인 여정이다. 익숙한 편안함을 박차고 낯설고 험한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는 어려운 과정을 견뎌내, 인격의 성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홀로 광야에서 사탄과 마주하며 대중과 함께 할 날을 준비했던 예수나 오랜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체험이 그중 가장 높은 수준의 성숙, 변화였을 것이다. 반대로 타향에서 자신에게 약이 되는 고생은 거부한 채 부모나 타인이 채워주는 돈을 원없이 쓰가며 한가하게 즐기고 오는 팔자, 좋은 떠남은 퇴행적 의존의 연장일 뿐이다.

 

괴테도 오랜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여행을 떠나 타성에 젖었던 여자관계도 정리하고, 본격적 창작 작업에 매진한다. 이처럼 휴가로 인생의 큰 전환을 경험한 위대한 인물들의 예는 많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의 평범한 휴가는 오히려 자신을 고갈시키는 경우가 많다. 전쟁하듯 여름 여행을 치른 후 오히려 몸과 마음이 더 지치게 되는 경우도 많다. 함께 24시간을 지내다보니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 않으면, 불안과 분노가 올라와 누군가를 꼭 비난해서 함께 있는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든다. 날은 덥고 길은 막히고, 음식은 형편 없는데 싸우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하다. 만약 동의하는 공통분모가 없다면, 싫다는 사람을 끌고 다니면서 감정을 소진시키기보다, 차라리 각자가 편한대로 휴가를 보내는 것도 방법이다. 하루 정도는 함께 식사하고, 영화나 보면서 안락하게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도 스트레스지만 노는 것도 스트레스이다. 여행을 통해 나와 상대방에 대해 좀 더 알고 가까워지고 싶다면, 가능한 한 스케줄을 간단하게 짜고 겸손하게 상대방의 의견과 취향을 경청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마음이 자유로우면, 한 평짜리 방도 무릉도원이지만, 미음이 괴로우면 대궐도 답답할 뿐이다. 알코올 중독자들의 주장을 마치 고뇌의 상징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제다. 술을 핑계 되면 뭐든 관대하게 넘어가는 사회에 알코올 중독자가 더 많다. 좋게 말해 예술가적 기질이 있거나, 마음결이 섬세한 이들이 술에 약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알코올에 대한 집착은 어머니 젖을 빨듯 술잔에 탐닉하는 퇴행적 모습일 수 있다. 술은 긴장을 풀고 창조성을 진작시키는 면도 있다. 너무 경직되고 빈틈없는 것보다는 약간 풀어지고 퇴행할 수 있는 술자리가 더 재미있고 편안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을 갖고 있거나, 알맹이 없는 공허한 대인관계에 지친 이들에게 술은 살아

가는 재미를 줄 수 있다. 일탈을 통해 흥분을 맛보게 하는 것, 즉 섹스, 술, 마약, 도박 같은 것은 모두 치명적인 습관성을 내포한다.  비만, 자살, 암 등에 비해 술에 의한 사회적 손실이 크지만 심각한 술꾼과 괴상한 술자리를 너무 자주 접하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모르고 이 사회가 점점 더 병을 키우는 것 같다. 비겁하게 술로 회피하려 하지 말고 마음깊이 숨어 있는 공허감, 우울, 좌절, 애정결핍과 정면으로 대면하여, 진짜 자신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많은 사회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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