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삶과 언어가 어떤 관계인가를 주목한 철학자가 비트겐슈타인이다.  세계는 사물들로 구성된다. 언어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을 지시할 따름이다.  언어는 사물을 지시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언어가 사물을 더이상 묘사하지 못할때 언어는 한계에 이른다. 정의에 따라 맞는지 아니면 틀렸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명제들을 제외하면, 경험에 따른 검증만이 어떤 명제가 의미 있는지 또는 의미 없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경험으로 검증이 가능하지 못한 진술은 의미없는 사이비 명제일따름이다. 낱말이 지닌 의미는 그 낱말이 가리키는 특정 대상이 아니라, 그 낱말이 어떻게 사용 되는가에 따른다.  언어는 인간 삶을 엮는 형식이다. 고통이라는 낱말은 집이라는 낱말이 집을 가리키듯이, 고통을 지시한다믿는다. 이러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언어 사용 방식을 크게 오해하고 왜곡한다. 철학은 새로운 개념과 이론을 내새워야 할 까닭이 없다. 철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둔다. 철학은 형이상학 차원에서 사용하는단어를 일상차원으로 되돌려 놓으면 그만이다.

 

고통이라는 낱말을 배울때, 그 낱말이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고 배우지 않는다. 사람들이 겪는 내면상태가 언제나 같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낱말을 배우려면, 그 낱말에 대응하는 내면상태가 아니라 그 낱말이 어떤행위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게임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서 게임이라 불리는 온갖 게임이 지닌 특성, 특질, 속성 , 본질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게임은 그 무엇을, 그 대상을 가리키기보다 오히려 어떤 문맥에서 사용될 따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오로지 한 개인만이 인지하고, 또 그 개인이 겪는 은밀한 경험을 가리키는 개인언어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어떤 경험이든지 외부기준으로서 언어를 거쳐야 비로소 경험이 된다. 내가 어떤 고통을 느끼면 유사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도 그러리라는 생각은 불합리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 느낌에 비추어 다른 사람 느낌을 감히 추론할 수 있을까? 추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이 겪는 느낌이 아니라, 바로 내 느낌일 뿐이다. 내 마음은 순전히 나 혼자를 대상으로 삼는 만큼 그 정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과연 특별한이라는 감각을 정확히 인지하여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가? 외부 사실에 비추어 확인할 길은 없다. 규칙 준수는 그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 개인이 겪는 내면경험에 따르지 않을만큼 공공성과 사회성이라는 특징을 지녀야 한다. 혼자 겪는 경험을 마치 공공경험인듯이 생각하는 것이 큰 문제다. 자기만 쓰는 언어로 감각을 표현하는 사람은 저마다 상자 하나 앞에 놓고 자기 상자 안에 든 물건을 무조건 '풍뎅이'라고 부르는 사람과도 같다. 여기서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를 들여다보지 못하며, 어느 누구나 풍뎅이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자기 풍뎅이만을 봐야 한다고 해보라. 이 상황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내용물을 지닌 상황이거나, 그 내용물이 다른 물건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데 '풍뎅이'라는 말을 한들 아무 소용 없다. 감각을 지시하려고 사용하는 단어는, 단어 사용자가 혼자서만 파악한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어야한다. 단어 사용은 언제나 공동 활동과 연계되어야 한다. 공공활동을 통해 고통이라는 단어를 베우고 공공활동을 거치면서 단어는 의미를 얻는다. '내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물음은 공공활동에서 단어로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내면에서 혼자서 겪는 어떤 느낌만으로는 어떤 개념도 생기지 않는다. 공공활동을 통해 내면을 언어로 표현해야 비로소 그 내면을 지닌다. 세계란 언어로 표현되는 곳이다. 언어로 파악되지 못하고, 언어와 별개로 인식되는 세계를 내새우는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채 혼자만 겪는 경험으로 세워지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내면에서 겪는 경험은 언어로 표현되어야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인간세계는 언어세계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수단은 오로지 언어뿐이다. 내'자아'란 언어 활동이 빚어내는 소산이다. 개인경험은 언어활동이 가능해지는 공공활동이 빚어낸 소산일 따름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인간 삶이란 언어를 바탕으로 삼는 사회활동이다. 언어는 곧 삶을 엮는 형식이다. 삶을 엮는 형식이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배경이다. 논쟁이란 서로 삶을 엮는 형식이 서로 같다는 점을 바탕으로 생기는 한 인간행태이다. 문제는 삶을 엮는 형식이 서로 다름으로 말미암아, 의사소통과 상호이해가 불가능해진다. 삶을 엮는 형식이 서로 달라지므로서 개념체계가 달라지며, 서로 다른 체계에 따라 진리 기준도 달라진다. 저마다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를 때, 거기에 관여할 수 없다. 상호소통이 가능해야 비판이든 비방이든 가능해진다.

 

지극히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한 개인에 머무는 경험은 그 경험이 에워싼 그 주변 여건과 무관할 수 없다. 그 주변 여건은 언어를 발화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겉으로, 밖으로 드러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비롯된다.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은 언어다. 이 세계에 어떤 가능성을 부여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가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행위가 숙고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본능에 따른 강력한 충동에서 비롯된다면 인간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리 보인다.  정신분석학이 지닌 가장 두드러진 특질은 인간 정신생활을 의식과 일치시키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정서가 형성되는 곳은 가정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와의 관계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첫번째 사랑은 어머니고, 여자아이의 경우는 아버지이다. 이 같은 심리상태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생명의 에너지는 본능이다.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더라도 이 에너지를 지배할 수는 없다. 원시상태에 놓인 인간의 본능과 그에 맞서는 문명사이에서 갈등은 불가피 하다. 프로이드는 말한다. ‘문명은 본능을 포기해야 성립한다’. 사회는 개인을 거역하여 유지될 수밖에 없다. 문명화된 개인에게 성생활은 철저하게 유린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드는 죽음 본능으로서 타나토스를 끌어들인다. 타나토스는 공격 성향으로 파괴하려는 힘을 뜻한다. 원시인들은 어떤 제한도 없이 그들의 욕구를 자유로이 발산해서 행복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행복을 누리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본능을 포기하지 않으면, 모두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길이다. 그래서 마침내 본능을 억압하는 문명에 굴복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본능을 억압하는 풍조가 히틀러 같은 인물을 양산한다고 주장한다. 그 분석에는 파괴충동은 성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랑이나 성욕구를 충족하려다가 장애애 부딪히는 순간, 누구나 좌절감과 증오감을 품기 시작한다. 증오감은 접어야 하고, 억눌러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억눌러야 하는 감정과 결박해야 할 감정은 점차 불안을 야기하고, 마침내 공격성향을 키운다. 빌헬름 라이히는 아무 장애없이 생체 흐름에 자기를 맡기는 능력을 오르가즘으로 정의한다. 오르가즘은 단순히 성욕구에 따른 흥분이 아니다.오르가즘이란 에너지 흐름이 원활한 상태이다. 그 흐름이 막히거나 정지됨으로써 성격장애가 생긴다. 히스테리는 오르가즘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생겨나는 현상이다. 자유로운 흐름이 막힐 경우 외부세계를 공격하거나,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를 구축하는 현상이 생긴다.

 

히스테리 환자는 증세를 그냥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환자는 마치 갑옷을 입기나 한 듯이 증세를 은폐한 채 도덕규제에 순응한다. 히스테리 환자는 매우 공손하게 또 교묘하게 자기 불안을 감춘다. 그는 거의 모든 일에서 양보를 실천한다. 그러나 그 공손함은 그 사람 심리구조 가장 바깥 층에 불과하다. 공손함은 증오심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이다. 결론은 과도한 공손함은 위장된 증오를 표현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공손한 사람은 가장 잔인하고 위험하다. 결론은 히스테리증세를 보이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억압과 제약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냐'고 묻고 또 물어라.  (0) 2013.12.02
언어와 삶  (0) 2013.11.27
노동은 신성한가?  (0) 2013.11.25
인간은 왜 세상을 바꾸지 않는가?  (0) 2013.11.21
인간은 누구인가?  (0) 201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