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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목적 없는 삶

무엇이 이상사회인가?  플라톤은 통치자로서 철학자가 지닌 지식이 완전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퍼(1902-1994)에게는 인간이 지닌 어떤 지식도 불완전할 따름이다. 과학도 불완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과학이 거쳐온 과정은 발전하는 진보과정이지만, 이 진보 과정이란 곧 시행착오라는 과정이다. 시행과 착오란 곧 추측과 반론을 거치는 과정이다문제해결을 목적으로 먼저 대담한 가설이 나온다. 이 대담한 가설은 추측에서 비롯된다. 대담한 가설은 추측인만큼 반증이나 반론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반증과 반론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 대담한 가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과학이론은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과학자들이 각개인이 가진 관심이나 가치관에서 벗어날수 없다. 어떤 문제를 선택하느냐는 과학자가 가진 관심이나 가치관에서 벗어날수 없다. 어떤 문제를 선택하느냐는 과학자가 가진 관심이나 가치관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보장함으로서 비로소 인간들사이에서 객관성을 찾을수 있다. 열린사회란 아무 제약없이 여러 제안을 할 수 있는 사회이며, 비판과 토론으로 새로운 삶이 가능해지는 사회이다. 인간은 불완전함으로 온갖 비극을 겪는 존재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함을 지적하는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인간은 마땅히 비판과 토론이 살아 숨쉬는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오늘날 도덕, 정치, 문화는 혼돈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있는가? 임신중절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은 자기신념과 가치를 내세운다.  반면 임신중절 권리에 반대하는 사람은 또 다른 신념과 가치를 내세운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어떤 신념과 가치가 우월한 평가를 받아야 할까를 결정수 있는 어떤 준거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오늘날 도덕이 처한 곤경이다. 도덕 논쟁이 벌어지는 실제 과정에서 개인들사이에서  의지와 신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본성과 인간본성이 지닌 목적이라는 흔적을 외면하는 도덕이론이 이모티비즘이다. 이모티비즘은 현대문화가 지닌 특징을 반영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인간형은 탐미주의자, 관리자, 임상 치료사이다. 탐미주의자는 자기만족을 누리면서 권태를 느끼지 않게 하는 무대로 사회를 생각할 뿐이다. 그에게 타인이란 자기만족을 얻는 수단일 따름이다. 관리자는 자기목표를 제대로 달성하려고 주변 사람들과 재화를 조직하고 조정한다. 그는 목표를 제대로 설정했는지를 결코 평가하지 않는다. 그에게 목표는 성찰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졌을 따름이다. 임상치료사에게 중요 관심사항은 환자가 보이는 히스테리 증상을 치료하여 환자가 어떤 목적을 품든,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머문다. 히스테리 증상을 치료하는 것은 환자가 품은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써 가치를 지닐뿐이다. 임상치료사에게 관심사항은 테크닉, 효율성, 효과성이다.  현대문화가 지닌 특징을 반영하는 인간형은 사람을 단순히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 이들은 목적을 평가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은 지극히 불분명해졌다.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이란 인간이 어떤 활동을 하든지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본성이 어떤 목적을 지닌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파악할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을 세우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이다. 사람을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는 개념은 살아가는 방식에 뿌리를 박고 있다. 가족 구성원, 시민, 군인, 철학자, 사제 등이 목적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완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중요한 물음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물음에 자기에게 스스로 묻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사회를 사회학자들은 타인지향형 사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최근에는 피로사회라고 명명한다. '피로사회'란 자기를 스스로 돌아볼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이다.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자기가 누구인지를 결코 묻지 않는다.

 

피로사회를 사는 사람은 그저 묵묵히 일을 할 따름이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이다. 인간 전체가 모두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 성과만을 산출하기를 요구한다. 성과사회는 활동사회 이다. 피로로 말미암아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탈진상태에서 필요한건 오로지 내 휴식뿐이다. 탈진상태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지만, 이쪽 저쪽 모두 피로하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공동체, 공동으로 영위하는 삶, 모든 친밀함, 심지어 언어자체도 파괴한다. 피로사회 사람은 마치 기계와 같다. 피로사회는 보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고 쓰는 것을 막는다.  이 세가지는 성찰능력을 이루는 요소이다. 성찰은 자극에 저항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성찰하는 삶만이 인간다운 삶이다. 외부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자기를 스스로 나서서 조종해야 한다.

 

허무환 삶이란 벌거벗은 삶이며, 벌거벗은 삶이란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모두 상실한 삶이다. 호모사케르가 사는 삶이다. 호모사케르란 어떤 범죄로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호모사케르는 경계에서 쫓겨난 자들이나,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삶을 상실함으로서 호모사케르가 되고 만다. 잠이 육체를 이완해주는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이완이 다다르는 정점이다. 활동과 분주함은 어떤 새로움도 주지 못하고 가속을 야기할 뿐이다. 인간에게 심심함이 자꾸 사라져 간다. 모든 면역은 낯선 것에 대한 반응이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하는 것이 면역학이다.  안과 밖, 친구와 적, 나와 남 사이를 가르는 경계선이 있었던 시대에서 나온다. 우울증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않는 성과사회로 말미암아 발생한 극악한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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