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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물음이 답이다.(최용철)

인간에게 목적이란 무엇인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계를 목적있는 세계라고 했다. 목적을 파악하려면 먼저 보이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플라톤은 지금 여기 있는 보이는 것들을 외면한 채, 그것들을 '초월하는 실재'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일상 경험 그것만으로 놀라움이고 풍요였다. 철학은 경험을 탐구하고 그 경험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일만을 해야할 뿐이다. 철학은 경험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우리가 언어로서 천둥을 가리킬 때 구름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구름에서 나오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궁금해서 묻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해 나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이름을 가진 책을 가장 먼저 쓴 원조이다. 형이상학이란 자연학 다음에 나오는 저작이라는 뜻이다. 형이상학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물음은 '실체란 무엇인가?'이다. 너스바움은 실체 물음을 두 개로 재구성한다.  하나는 변화 문제이며, 또 하나는 동일성 문제이다. 사물은 변한다. 사물은 변화하면서도 그 사물은 같은 사물로 남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면서도 계속 지속하는 속성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같은 사물로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그 사물이 그 사물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다. 변화 속에서 '여전히 같은 것으로 존재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 핵심이다그것은 실체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 물음에 답변하려면, 그 사물이 바탕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사물이란 어떤 특정 성질보다 그 성질을 담는 바탕으로서 그 무엇이다.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범주가 필요하다. 범주는 사물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물들은 그 본성에 따라 다양한 범주에 속하며, 그 범주는 유사종을 구성하는 요소를 분류한다. 실체를 설명하는 개념은 '범주와 술어'였다. 술어는 색이나 크기와 같은 우연한 특징을 서술하기도 하고, 또 필연성을 지닌 본질을 서술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사물이란, 그 개별 성질, 그 이상 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사물은 그 근저에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그것이 바로 실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마주하는 순간 겪는 놀라움과 경이감에서 비로소 철학이 나온다고 형이상학에서 주장한다. 이러한 경이감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왜 자연이 이러한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르는 탓에 알고 싶은 욕구를 누르지 못한다. 그는 '왜?'라는 물음에 무수한 설명이 가능하지만, 적어도 네가지 설명만큼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네가지 원인으로 질료인(소재, 재료), 형상인, 운동인, 목적인이다. '왜 나무는 자라는가?라는 물음에 질료인은 나무가 그러저러한 질료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자란다고 대답한다. 질료 목록만으로는 나무가 다른 사물과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떤 구성 요소와 구조를 지녔는가를 대답하지 못한다. 그래서 형상인이 등장한다. 형상인은 나무가 어떤 방식으로 자라는가를 대답한다. 또 운동인은 나무가 주변 환경과 어떻게 서로 작용하는가를 대답한다. 끝으로 목적인은 나무가 무엇이 되려고 자라는가를 대답한다.

 

지금 여기 있는 사물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다. 사물은 지금 여기있으면서도 변화로서 운동하는 중이다. 그렇다고 그 사물이 아무 목적이 없이 무의미하게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모든 사람에게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행복해지려고 사람들은 온갖 활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행복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번역한 말이다. 본래 에우다이모니아는 '좋은'을 뜻하는 그리스 접두사 에우eu와 '영혼'을 가르키는 다이몬dimon을 합성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좋은 상태의 영혼을 의미한다. 영혼이 좋은 상태로 놓이지 않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다. 합리성은 인간이 지닌 탁월성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그것은 인간다운 덕이다. 덕은 그리스어 아레테arete를 번역한 말이다. 아레테는 고유한 능력이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다. 물론 인간이 이성 능력을 지닌 동물이라고 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이성을 발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이성 능력을 사용할 잠재능력이 있다는 그런 뜻이다. 행위는 단순히 신체 움직임이 아니다. 행위에는 어떤 의도와 목적이 따른다. 어떤 의도와 목적을 품는다는 것은 곧 사유(思惟)과정을 거친다는 뜻이다. (思惟: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사유 과정으로는 생각, 숙고, 선택을 한다. 짐승은 주어진 자극에 따라 본능에 따라 반응할 따름이다. 인간에게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려는 본능이 있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아니듯이, 잠재력이 현실이 아니다. 도토리가 저절로 커서 울창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적절한 조건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수 있다는 잠재력이 곧 사회구성원이 되는 자격요건이 아니다. 인간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갈수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려면 적절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 적절한 조건이 국가이다. 규범은 인간 본성에 어긋나기보다 인간본성을 완성시킨다. 자연 (본성), 규범, 이성, 이 세가지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

 

좋은 삶이란 두 극단사이에 놓인 중용이다. 너무 지나치지 말아야하며, 너무 모자라지도 말아야한다는 중용은 그리스인이 품었던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것과 너무 모자란다는 것은,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모호하기만 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지나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적당한 것일 수도 있다. 경계가 모호하다고는 하지만, 그 경계를 좀 더 분명하려면 개개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경지인 중용이 수학계산으로 두 극간 사이에 놓인 간격을 둘로 똑같이 가르는 한가운데에 놓이지 않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누누이 강조했다. 용기는 비겁보다는 만용에 조금 더 가깝다. 관후寬厚는 인색보다는 호탕에 조금 더 가깝다. 그러나 적당한 사람에게,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정도로 베풀기란 어려우며, 모든 경우를 모두 포괄하는 엄밀한 규정이 없다. 나는 잘못 판단할 수도 있으므로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덕은 결코 타고나지 않는다.  덕은 훈련이 따른 결과이다.  타고난 능력이라면 태어난 후 발후하면 그만이지만, 덕은 그렇지 않다. 덕은 훈련한후 습관으로 얻어진다. 정의로운 사람이려면 정의로운 행위를 반복 훈련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흔히 친구를 가족과 구분하고, 우리가 속한 조직과도 구분한다. 그러나 고대아테네 시민들은 자기 가족이나 애정을 느끼는 지인뿐만 아니라, 정치활동이나 경제활동을 같이 하는 동료들도 사랑스러운 친근한 사람으로 필로스philos에 포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애, 그 기본 바탕을 자기애라고 규장한 후, 이 자기애가 이기주의인지 묻고, 이기利己가 지닌 두 의미를 구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든가, 이기주의자라는 말이 치욕스럽게 쓰이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서로 비교한다. 치욕스럽게 쓰이는 경우란 재물이나 명예나 육체에서 오는 쾌락을 악착같이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을 가르키는 경우이다. 정의로운 행위나 절제있는 행위 또는 덕에 따르는 행위를 자기를 고귀하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가리켜 자기를 사랑하는 자라든지, 이기주의자라고 부르는 것 역시 가능하다. 명상하는 삶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치있는 삶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사에 분주히 참여하는 삶이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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