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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키건, 박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거움

우리 모두 죽을 거라는 사실은 필연적인 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죽음의 필연성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로는 충분히 나쁘지만,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게 더 나쁘다.  내 존재에 대한 핵심적인 진실에 작면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죽음을 더 나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아무것도 바꿀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죽음에 대한 절망감도 어느 정도 사그라질 것이다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일들로부터 더 이상 가슴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 실망할 필요도 없다. 다른 결과는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선택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깨달았을 때, 슬퍼할 이유가 사라진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이를 내면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덜 부정적으로 바라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을 것이라는 필연적 사실은 보편적 문제이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슬픈 사실이 내게만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여러분은 어떤가? 나 혼자 죽는 가혹한 형벌을 받는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된 운명이다. 그런 생각으로부터 우리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개인적인 책임을 떠나서 어떤 사람들은 부유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다는 사실은 나쁜 것이다. 이처럼 경제적인 불평등을 도덕적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본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죽음과 관련된 불평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평균이하의 수명을 사는 사람은 억울할 것이다. 평균수명 이하를 사는 사람들은 불운이라고 생각하고, 평균이상을 사는 사람들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가난뱅이로 시작해서 부자 인생으로 끝난다. 또 한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어났지만 초라한 인생으로 끝난다. 두 사람은 행복 시점만 다를 뿐이지, 삶의 내용물은 동일하다.  그런데도 첫 번째 인상을 선호한다면, 인생의 전반적인 형태도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우리 모두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발전하는 이야기는 갈망하지만, 좋은 것에서 나쁜 것으로 추락하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절정의 순간을 맞이한 뒤 삶의 궤적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형태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전반적인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 우리는 전반적으로 이상적인 삶의 형태에 대해 걱정할 밖에 없다. 성취의 관점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삶이 어디서 정점을 찍기를 바라는가? 문제는 예측 불가능으로 인해 어디서 정점을 찍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점을 너무 뒤로 둔다면,  오랜 시간을 고생해야 할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최고의 인생을 위해 계획을 세우는 일이 더욱 힘들다. 그렇다면 정말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이 좋은 것일까? 여러분은 얼마 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알고 싶은가? 아마 인생은 짐이 될 것이다. 매일 그것만 생각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전자 검사까지 해가면 질병의 가능성을 검사한다. 가령 40살에 사망하게 되는 유전적 질병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검사를 통해 구 유전자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20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러한 사실을 알기 위해 그래도 여러분은 이 검사를 받을 것인가? 내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지 알게된다면, 지금과는 다른삶을 살고 있은가?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게된다면, 정말로 원하는 일에 더 집중하게 될까? 앞으로 1년, 5년, 10년 밖에 남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죽음은 필연성과 가변성이 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든 죽을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완전히 안전하다고 느낄 때에도 우리는 뇌졸중으로 급사할 수도 있다. 또는 심장마비로 순식간에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죽음의 가능성을 높이는 활동들이 있다. 이런 활동을 하는 동안, 여러분은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죽음의 가능성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활동을 하겠는가?

 

죽음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일을 가치있게 여기고 있는지 확인해 볼수 있다. 우리가 인정해야할 것은 삶이 더 많은 것을 선사할 수 있는 동안에도 죽음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이유로, 그런 활동을 기꺼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가능성이 오히려 욕망을 자극한다면, 죽음의 편재성(어디에나 있다)나쁜게 아니라, 좋은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진실은 삶을 영위하고, 그 다음에 죽음을 맞아힌다는 사실이다.  결국 존재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특정한 조합으로 이뤄진 형이상학적 합성물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삶 자체 또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조합함으로서 만들어 내는 전반적인 가치이다. 모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운명 때문에 우리 삶은 한정되어 있다. 삶은 인간에게 환상적인 많은 것을 선사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모두 빼앗아버린다.

 

맛만 보고 빼앗겨 버리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 때 왕이었던 사람이 왕국이 몰락하여 웨이터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 인생을 전체가 아닌 왕으로서의 삶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그다지 나쁠 것도 없다. 웨이터로서의 삶 또한 따로 떼어놓고 보면, 그리 나쁜게 아니다. 문제는 왕이었다가 웨이터가 되었다는데 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썩어가는 시체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조건에 관한 명백한 비극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 그런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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