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에 내가 권총으로 존이라는 사람을 쏘았다.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치명적인 부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만, 월요일에 그는 죽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 내가 갑적스런 심장마비로 죽는다. 수요일 존이 죽었다. 나는 존을 죽였다. 내가 쏘지 않았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과연 언제 그를 죽인 것일까? 총을 쏘았던 월요일인가? 월요일 그는 분명 살아있었다. 나는 수요일에 그를 죽인 것일까? 그는 수요일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월요일에 내가 그를 총으로 쏘았고, 그로 인해 수요일 사망했다. 내가 존을 죽였다는 사실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언제 죽였는가? 죽음이 내게 나쁜 것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내 죽음은 언제 내게 나쁜 것인가? 엄연한 사실이지만 정확하게 시점을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지금 내게 나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지금 분명히 살아있다.
박탈이론에 따르면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삶의 좋은 것을 모두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나 나쁜 것인가? 죽음으로 인해 삶의 좋은 것들을 빼앗긴 기간동안 일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뭔가가 내게 나쁘거나 좋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존재하고있어야 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박탈당한 이유이다. 비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죽음이 내게 나쁜 이유가 될 수 있는 이유이다. 고유한 정자와 고유한 난자가 결합하면 지구상에 단 하나밨에 없는 고유한 유전자 코드를 지닌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 아마 부모님이 5분 늦게 아니면 5분 일찍 성관계를 가졌다면, 아마 다른 정자와 난자가 결합했을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내가 아닐 것이다. 여성은 30년에 걸쳐 1년에 12개씩 난자를 배출한다. 남자는 훨씬 많은 정자를 생산한다. 대략 한번에 4000만개의 정자를 배출한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뭔가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수의 태어나지 않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사례를 가슴아픈 도덕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발생한 박탈에 대해 나는 그 어떤 고통이나 슬픔이나 실망을 느끼지 않는다. 나쁜 그 뭔가가 일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한사람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그가 90살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가 90년이 아니라 50년 밖에 살지 못했다고 생각해보자. 90살이 아닌 50살의 인생을 살면서 40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그에게 나쁜 것이다. 삶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인생의 축복을 더 많이 빼앗기고,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로마시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이 나쁜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는고 생각했던 사람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우울해 한다. 우리는 죽음이 나쁜 것이라고 믿는다. 왜? 죽고 나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면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가? 내가 존재하는 또다른 시간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이고, 죽고나서도 영겁의 시간은 이어질 것이다. 이를 생각하면 우울해진다. 죽음이 정말로 나쁜 것이라면, 태어나기 이전에도 영겁의 세월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울해야 하지 않을까? 생전기간과 달리 사후기간은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관련 있다. 우리가 상실이라고 말할 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어떤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생전기간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고, 삶이란걸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면, 아무 것도 상실한 것은 없다. 뭔가를 잃어버려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상태를 상실이라고 한다면, 아직 갖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갖게될 상태를 '쉬모스'라고 정의하기로 하자.
왜 우리는 쉬모스보다 상실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 지금은 갖고있지 않지만, 앞으로 갖게 될 상태보다 갖고 있다가 더 이상 가질수 없는 상태가 더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자동차 사고로 80살에 죽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때 내가 죽지 않았다면, 90, 100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해볼 수 있다. 그래서 사고로 인해 죽는 것은 나쁜 것이라 할 수 있다. 생전 기간의 비존재가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더 일찍 태어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출생은 필연적 사건이다. 다른 난자와 정자가 결합했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더 일찍 태어날 수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죽음 시기를 뒤로 더 미루어 오랫동안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출생의 시기를 앞당겨 오래 사는 것은 불가능 하다.
현대 철학자 프레드 펠드먼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만약 내가 자동차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오래 이어지는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아라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만 출발점을 앞당기는 것일뿐이다. 더 일찍 태어나는 상황을 상상할 때, 우리는 더 길어지는 삶이 아니라, 단지 더 이른 삶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시점이 더 이후에 찾아온다고 상상할 때, 우리는 더욱 길어진, 그래서 더 많은 축복을 포함한 삶을 생각한다. 현대 철학자 데렉 파피트는 '왜 우리는 쉬모스가 아닌 상실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가?' 라는 대답으로 '그 선택은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과거에 신경을 쓰지 않은데 반해,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인간에게 각인된 매우 일반적인 성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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