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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키건, 박

죽음은 나쁜 것인가? (1)

거시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죽음이란 육체가 더 이상 그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나는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를, 인격의 상당부분을 동일하게 유지한 채 존재할수 있기를 원한다. 죽음이 정말로 끝이라고 믿는다면,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없는데 무엇이 내게 나쁠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음이 나쁜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한다. 주변에 누가 죽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을 만날수 없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수도, 영화를 수도, 웃을 수도 없다.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모든 교류의 가능성이 막혀버린다.  아마도 이것이 죽음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죽은 사람에게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죽음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뒤 남겨진 사람 때문이다. 죽음이 어떻게 죽은이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을 까? 죽는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기 때문에 혼란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죽을 것이라는 예상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 우울한 느낌이 들고, 그렇기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내게 나쁜 까닭은 무엇인가?  죽음 뒤에 나는 존재하지 않는데.... 죽고 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못하는게 나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을 어떻게 뭔가가 여러분 자신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을까?

 

두통에 대해 생각해보자. 두통은 분명 나쁜 것이다. 아프기 때문이다. 두통을 느끼는 순간, 여러분은 존재하고 있다. 죽은 사람들은 두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때 어떻게 뭔가가 여러분에게 나쁜 것이 될 수 있는가? 뭔가가 본질적으로 나에게 나쁠 수 있다. 머리가 아프거나 뭔가에 찔렸을 때 아프다. 고통은 본질적으로 나쁘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 한다. 뭔가 도구적으로 나쁠 수 있다. 해고는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과 빚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고통이나 우울함 같은 본질적인 나쁜 것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해고는 도구적으로 나쁜 것이다어떤 것을 가지기 위해 다른 좋은 것을 놓친다는 점에서 뭔가가 상대적으로 나쁠 수 있다.  집에서 TV를 보고 있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렇다면 그 프로는 나쁜 것이 아니다. 어떤 프로를 보느라 정작 재미있는 파티에 가지 못했다면, TV 시청이 내게 상대적으로 나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지 못해 나쁠 수 있다는 것은 기회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면 얻을 수 있는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박탈해 버리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는 설명을 '박탈이론'이라 한다. 죽음은 삶이 내게 주는 좋은 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가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죽음이 나쁜 것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런 사실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물론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죽음은 지금 내게 하나도 나쁠게 없다. 죽고나면 나쁠까? 그렇지도 않다. 내가 존재하지도 않는데 뭐가 내게 나쁘단 말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