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삶의 마지막 순간

많은 환자들이 극도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그들은 의사의 회진을 기다리고, 엑스레이 촬영을 기다리고 약을 가져오는 간호사를 기다린다. 그들의 일상은 단조롭고 끊임없는 반복이다. 그러한 단조로운 일상속에서 누군가가 그를 찾아와 마음을 흔들어 놓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의 삶을 궁금해 하고, 그들의 감정, 그들의 힘, 그들의 희망과 분노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 의자를 끌어 그의 곁에 앉는다. 시간에 쫓기는 기색 없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결코 돌려서 말하지 않고 분명하고, 직설적이고, 단순한 언어로 그들이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 두었던 그러나 수시로 떠오르는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환자의 단조로운 일상과 외로움, 아무 기약도 없는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걷어낸다.

 

더 이상 지상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던 환자들에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언제 빼앗길지도 모르는 시간을 사는 것이며, 의사들의 회진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며 사는 것이며, 면회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사는 것이며, 간호사가 말을 걸어주기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 시한부 환자들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런 상황에서 낯선 방문객이 그들의 감정을 살펴 주고 그들에게 닥친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는지 질문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과연 놀라운 일인가?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곁에 앉아서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 환상, 소망 같은 것을 들어 주었던 사람이 누구 있었던가? 환자들은 그들을 걱정해 주고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마움을 느낀다.  환자들은 온갖 기계와 숫자만이 바쁘게 돌아가는 병원에서 그러한 작은 친절을 누릴 권리마저 빼앗기고 만다.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 과 죽어감이라는 말을 기꺼이 사용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많은 환자들이 가장 환영했던 점이다. 환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분명한 것은 그들이 의사로부터 얘기를 들었건, 듣지 않았건 자신의 병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이나 의사 앞에서 항상 인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런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그런 얘기를 드러내놓고 해서는 안된다는 노골적인 혹은 은밀한 신호를 감지한 환자들이 일단은 그러한 신호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싶은 욕구, 가면을 벗고 진실을 얘기하고 싶은 욕구,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들은 그런 감정들을 표출할 기회를 환영하고, 다가오는 죽음과 아직 못다 이룬 일들에 대해 기꺼이 얘기 하려는 우리에게 고마워 한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 특히 분노, 시기, 죄책감, 소외감 같은 감정들을 이해 해주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들은 의사나 가족들이 환자에게 의존할 때 혹은 환자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환자 자신이 상황을 부정해 주기를 기대할 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게 된다는 얘기도 한다.

 

환자는 병원측에서 진실을 직접 말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해 그다지 크게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중대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린아이 취급을 당하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다. 악성종양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면 주위사람들의 태도나 행동에 변화가 나타나게 마련이고,그런 변화로 하여금 환자들은 자신의 병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직접 얘기를 듣지 못한 환자들도 친지나 병원 직원들의 태도의 변화나 암시적인 말들을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예기치 못한 스트레스에 대해 모든 인간이 보이는 첫 반응은 충격과 부정이다. 부정의 태도는 길게는 몇 달 지속된다. 부정은 결코 완전한 부정은 아니다. 부정 뒤에는 분노와 노여움이 따른다. 그것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를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다. 이러한 분노는 병원 사람들이나 가족들 태도로 인해 더욱 강화 되기도 하고, 비이성적이거나 반복적인 행동으로 표출 되기도 한다. 환자의 이러한  분노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잘 인내해 주면 환자가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단계로 넘어 가는데 있어 디딤돌 역할을 하는 우울의 단계로 접어 드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여러 단계들은 순차적이기도 하고 겹쳐지기도 한다.

 

많은 환자들이 외부의 도움 없이 마지막 수용단계에 도달하지만, 평화롭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단계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단계에 있건 어떤 방식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건, 모든 환자들은 마지막 순간 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살 가망이 전혀 없다는 절망적이고도 치명적인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 가장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화해하지 못하는 것은 , 그 소식을 잔인한 방법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이 가진 희망에 대해 공감을 하건 안하건, 그들의 희망은 그대로 유지 되어야 한다. 환자들이 자신의 고민을 우리와 나누고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음을 흐뭇해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도 화제를 바꾸거나 보다 유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신호를 보낼 때가 있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물질적인 여유나 안락한 삶, 폭 넓은 인간관계 등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보다 죽음을 쉽게 받아들인다. 고된 노동과 고통의 삶을 이어온 사람들, 자식을 키우고 그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평화롭고 품위있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반면, 주위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지만, 마지막 순간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소중한 인간관계를 이루어 놓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차갑고 경직된 사회가 아닌 죽음과 죽어감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회 ,그런 대화를 격려하는 사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죽는 그 날까지, 보다 덜 두려워하며 살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화로운 죽음  (0) 2009.07.03
환자가족2  (0) 2009.07.02
환자의 가족1  (0) 2009.07.02
마지막까지 희망을  (0) 2009.07.02
수용  (0) 2009.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