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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환자가족2

 

침대마다 중병 환자들이 누워있다. 갓 태어난 아기도 있고 죽어가는 노인도 있다. 침대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최신장비가 달려 있다. 침대 밑 기둥에는 유리병이 매달려 있고, 흡입기가 있고, 모니터가 깜빡거리고 있다. 간호사와 의사들은 수시로 장비를 확인하며 위험신호가 잡히지 않는지 확인하느라 정신없다. 중환자실은 온갖 소음과 긴박한 상황과 중요한 결단이 있는 곳이다.

 

환자 가족들은 대체로 완전히 혼자 남겨진다. 그들은 기다림의 시간을 복도에서, 간이 식당에서, 혹은 병원 근처에서, 서성거리면서 보낸다. 어쩌다 의사와 간호사와 얘기를 해보려 하면, 지금 수술중이라거나 혹은 다른 일 보느라 바쁘다는 소리만 듣게 된다. 한명의 환자에 대해 책임있는 의료진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병원 사람들도 환자의 이름도 모르고, 환자들 역시 담당 의사 이름조차 모른다. 이쪽 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던 환자의 가족들은 결국 목사를 찾는다. 환자의 상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분노를 이해 받고 위로를 얻기 위해서이다.어떤 사람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쁘다는 판단을 할 때, 결코 우리 자신의 감정이 반영되어서는 안된다. 환자 가족도 앞서 설명한 환자들이 거치는 각 단계와 비슷한 적응과정을 거친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선뜻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가족중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 다니며 오진이었기를 바란다. 어쩌면 점쟁이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거나, 사실을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할 수도 있다.

 

엄청난 돈을 써가며 유명 병원이나 의사들을 예약하면서, 어떻게 보면 그들의 삶을 영원히 뒤바꿔 놓을 변화를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환자의 태도와 상황 ,인식, 능력, 의사소통 능력에 따라 가족들도 일련의 변화를 겪는다. 가족들이 자신들의 걱정을 환자와 나눌 수 있다면 그들은 중요한 문제들을 시간적, 감정적 부담이 적은 상태에서 미리 해결 할수 있다. 모두가 비밀을 지키려 한다면 가족과 환자간에 인공의 벽이 생기고 그 벽이 가족이나 환자가 슬픔을 견뎌내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가족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병원 사람들에게 투영하기도 한다. 간호사들이 아무리 정성껏 환자를 돌보아 주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사실 그러한 가족들의 분노에는 일종의 시기 같은 것이 잠재되어 있다. 가족으로서 곁에서 환자를 돌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때, 가족들은 병원 사람들에게 우롱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들이 놓친 기회에 대한 보상 심리와 죄책감도 작용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가 전에 가족들이 감정을 표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면 그들은 훨씬 더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분노와 원망, 죄책감을 모두 해소한 가족들은 죽음을 앞둔 환자와 똑같이 준비적 우울의 단계를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앞두고 슬픔이 많이 표출 될수록 환자가 세상을 떠난 뒤 견디기가 수월해진다.

 

가족들이 겪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아마도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환자는 가족들을 포함한 이 세상으로부터 서서히 자신을 분리시킨다.  가족들은 환자가 자신의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고, 한걸음 한걸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환자가 처음에는 가까운 친구들만, 그 다음엔 자식들만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부인만 면회 오라고 한다면, 그가 서서히 이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노인들은 경제구조의 관점에서 보면,그들이 사회에 보템이 되는 시기를 넘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삶을 품위있고 평화롭게 마감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경제력이 있는 경우에도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무능력해서 가족들이 원하는 수준의 품위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노인이 많다. 그런 경우 가족들은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들은 자신의 노후를 위한 저축을 포함한 집안에 있는 돈을 전부 끌어 모아서 노인의 마지막 간호에 쏟아 부어야 할 것인지가 화두로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노인들이 겪는 가장 큰 비극은 그들에게 들어가는 많은 비용과 가족들의 경제적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활 여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최저 수준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다 의료비용까지 발생해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다 보면, 가족들은 노인이 빨리 편안하게 눈 감아주기를 바라면서도 결코 공개적으로 그런 소망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 소망에 죄책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가의 특별 간호를 받던 할머니가 있었다. 모두 그 할머니가 빨리 세상을 떠나 주기를 바랐지만, 하루 또 하루 지나도 환자의 상태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환자의 딸은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야 할지 아니면 병원에 두어야 할지 몹시 괴로워 했다.   물론 환자는 계속 병원에 계속 있고 싶어 했고 사위는 평생 저축한 돈을 어머니에게 써버리는 아내에게 화를 냈고 두사람의 다툼은 계속 되었다. 딸은 어머니를 퇴원시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환자에게 평화롭고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다. 우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환자를 이용해서는 안된다. 환자 자신의 욕구가 우리와 정반대일 때 더욱 그렇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환자들은 육체적으로 병을 앓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스스로를 위해 중대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소망과 의견은 존중되어야 하며, 귀 기울여 주어야 하고 논의 되어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환자의 가족들이 애기하고, 울고, 필요하면 소리도 지를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자의 가족들은 환자의 곁을 지켜주되 감정을 나누고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들은 죽음과 관련하여 환자 본인보다 긴 시간을 슬퍼하는 사람들이다. 나쁜 소식을 듣는 그 순간부터 환자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동안 도움과 겪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친구이건, 친지이건, 의사건, 목사건 누구라도 환자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가족들의 얘기를 들어 줄 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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