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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죽어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마지막까지 희망을

사실 그들이 하루를, 몇주를, 그리고 몇 달의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은 희망때문이다.환자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에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하고, 또 언젠가 자신들의 고통이 보상 받을거라고 믿고 싶어한다희망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들이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그것이 절망의 포기가 아닌 수용의 포기일 때, 우린 환자들에게 더 이상 희망을 강요하지 않는다.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해 얘기하듯 누구나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얘기 할 수 있다면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얘기를 자주 할 수 있다면 환자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내도 될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전지 전능한 존재가 아니므로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런 생각들은 그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우리 자신의 합리화 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극도로 우울하던 환자들이 자신의 심각한 상태에 관해 속내를 털어 놓고 난 뒤, 서서히 달라지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들은 기분이 좋아졌고, 다시 식사를 하기 시작했고,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다. 적절한 때 시간을 내어서 그들 곁에 앉아서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 피하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고 확신한다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서로의 욕구를 이해하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을 함께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어가는 환자는 물론 남겨지는 가족들의 입장에서도 불필요한 고민과 고통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해도 우울해지지 않기란 힘들어요. 잘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때때로 우울해 지는건 어쩔 수 없지요어떤 날은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어떻게든 잠을 자려고 애를 쓰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힘들어져요. 그러다 보면 육체적으로도 힘들어 지지요. 꼭 무슨 운동을 할 때 처럼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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