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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위로( 앤서니 스토 지음, 이

관계에 집착하는 당신에게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 현상이다. 예전에는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현대 산업사회는 불안정하고 체계가 부족하다. 유동성이 크지면서 사회의 기둥이 위태로워졌다. 같은 환경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이상은 예전의 규칙들로 규정될 수 없고, 그런 이유로 인간관계는 걱정과 불안을 키우는 문제가 되었다. 프로이드는 정신생활은 본래 쾌락욕구 원칙, 그러니까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으려는 욕구에 지배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것은 만족스런 성생활을 누린다는 의미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다시말해 어떤 사람이 불행을 느낀다면 성적충동을 적절하게 배출하는 능력에 장애가 있다는 의미였다. 프로이드는 일생동안 본능적인 욕구의 충족, 즉 오르가즘의 능력을 강조했다. 만일 두사람의 관계에서 서로 상대에게 성적만족감을 줄 수 있다면, 그 밖의 다른 문제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프로이드는 환자가 본능적 충동을 성인에 걸맞는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제거하는 일이 정신분석의의 임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 정신분석 전문의들은 이 순서를 반대로 파악했다. 그들은 먼저 관계의 관점에서 생각한 다음, 본능의 만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처럼 대상관계 이론가들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단순한 본능 충족이 아닌 관계를 찾는다고 믿는다. 그들은 신경증이 나타나는 원인을 성적 충동이 억제 되거나,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라기보다 만족스러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정신분석 전문의와 환자의 만남은 다른 만남들과 확연히 다르다. 보통 사람들끼리 만남에서 한쪽이 다른 쪽의 태도를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하는 경우는 없다. 환자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관심을 기울여 주고, 자신의 문제를 언제든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을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정신분석전문의가 환자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경증 문제는 첫째 어린시절 부모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것과 관련 있으며, 둘째 건강과 행복은 친밀한 인간관계의 유지에 전적으로 좌우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성장하면서 겪는 여러 신경증 문제들이 어린시절 가정에서 경험한 정서와 관계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친밀한 인간관계만이 건강과 행복의 요소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건강의 구성요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프로이드는 사랑하고, 일하는 능력이라고 답했다. 여러 정신분석에서 오직 인간관계만 집중하다보니 개인이 성취감을 느낄수 있는 다른 방법들에 주목하지 못했다. 대상관계이론 분야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존 보울비는 '사람은 유아기를 지나면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안정되고 유익한 관계를 맺으려 하며, 이런 애착에 대한 욕구는 성적만족에 대한 욕구보다 훨씬 강하다'고 말한다.

 

아기들은 태어나서 9개월쯤 되면 특정한 사람에게 특별한 애착을 발달시키기 시작한다. 이 시기가 되면 아이는 낯선 사람에게 가지 않으려고 하고, 엄마를 비릇한 친숙한 어른에게 찰삭 달라붙으려 한다. 아이에게 엄마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토대가 되며, 엄마가 있을 때 아이는 엄마가 없을 때보다 탐험을 할때든 놀이를 할 때든 더 용감해진다. 만일 그 애착인물이 잠깐이라도 없어지면 아이는 대부분 저항한다. 입원을 해야 할 때처럼 좀 더 오래 애착인물에게서 분리되면 아이는 일정한 순서로 반응을 보이는데, 보올비는 최초로 이 반응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처음에 아이는 화를 내며 저항하고, 그 다음에는 낙담하면서 말없이 침울해 하다가 점점 무관심해진다. 그러다  시간이 더 지나면 초연해지면서 애착인물이 없는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엄마가 곁에 없을 때 이처럼 아이들은 저항, 낙담, 포기의 순서로 반응한다.

 

성인이 되어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능력은 어릴 적 애착인물과의 경험과 관계있다는 보울비의 견해는 충분히 설득력 있다. 자신이 필요로 할 때 언제나 애착인물이 곁에 있음을 확신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안정감과 자신감을 갖는다. 이런 자신감이 있을 때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믿고 사랑할 수 있다. 남녀가 사랑과 신뢰로 관계를 맺을 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어미와 떨어진 새끼 원숭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보면, 정상적으로 사회관계와 성적관계를 맺을수 없는 어른 원숭이들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음을 알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놀라울 정도의 회복력이 있다. 오랜 기간 고립되고 학대 받은 아이라고 해도 환경이 좋아지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성장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성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전 생애의 4분의 1에 가까우며, 이는 다른 포유동물보다 오랜기간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무력한 시기가 지속되는 덕에 나이든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배울 기회를 얻는데, 인간의 미성숙시기가 긴 생물학적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인간은 학습과 세대간 문화 전달을 통해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가 자라 성숙하면서 의존은 점차 사라지지만 애착행동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성인을 보며 의존적이라 한다면 그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그에게는 친밀한 애착이 없다고 하면, 그에게 뭔가 잘못이 있다는고 결론을 내린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조건으로 애착관계를 맺는 능력은 정서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인간은 평생 다른 사람들의 지지와 친교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는 모두 의견이 일치한다.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지적했듯 인간은 걸음걸이가 빠르지도 않고, 튼튼한 가죽이나 이빨과 발톱, 그외 무기가 될만한 것을 타고나지 못했다. 자신보다 힘이 센 종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커다란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 원시인들은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오늘날 현대인들 역시 수렵이나 체집과 거리가 먼 환경에서 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적극적으로 유대관계를 맺을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날 사회 구성원은 대개 가족간의 친밀한 유대가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이러한 유대에 더해 다른 이들과의 사랑과 우정도 필요하며, 바로 이런 관계들이 그들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독특한 관계들이 기둥이 되어 지탱되는 조직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이 관계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서 어떤 중요한 관계가 끝날 때까지는 그것을 분명하게 규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식도 거의 하지 못한다.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그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는다.

 

다른 사람들과 아무리 진실한 우정을 나눈다해도, 결혼생활을 하면서 느끼던 짙은 애착과 친밀감의 상실을 보상하기는 부족하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오직 친밀한 인간관계뿐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를 누리든 아니든 상관없이, 가정보다 더 큰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고 싶어한다. 오늘날에는 친밀한 관계가 개인의 충족감에서 절대적인 요소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별로 친밀하지 않은 관계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현대사회가 굉장히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어떤 조직의 성원이라는 인식, 완수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삶에 의미를 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기준틀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친밀하지 않아도 우리의 자아감을 형성하게 해주는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주친다. 이웃, 은행원, 상점 점원 등등 많은 사람들과 우리는 매일 다정하게 인사를 주고 받으며 편하게 지내지만, 그들이 삶에 대해서 아는게 없다. 그런데도 어느 날 그 사람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면 일시적이라 해도 얼마간의 상실감을 느낀다. 이럴 때 우리는 아무개에게 익숙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익숙한 존재 자체가 아니라 서로 알아봐주고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비록 보잘 것 없다해도 서로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지지해 주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가정보다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은 데, 직장에서 그들은 사랑을 받지 못한다해도 대신 인정과 존중을 받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많은 시간을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한다. 친밀감이 덜하고, 비교적 피상적인 관계도 일상에서 중요하다. 이웃끼리 거리에서 만나면 주로 날씨얘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래서 대화가 길어지면 다른 이웃에 대한 얘기로 화제가 넘어간다. 아주 지적인 사람들이라 해도 대체로 남의 험담을 좋아한다. 책이나 음악 그림, 사상, 심지어 돈에 관한 이야기에 비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이 대화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상을 초월한다. 친밀한 애착관계는 삶이 전개되는 하나의 중심축이지만 유일한 중심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