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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위로( 앤서니 스토 지음, 이

위대한 창조자들

타인에 의한 고독은 다른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독방감금은 가혹한 형벌로 인식되며, 여기에 공포와 불안, 수면부족 등 다른 요소들까지 더해지면 정상적인 정신기능이 붕괴되어 다시 회복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혹독하지 않은 상태의 감금이라면 유익할 때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많은 작가가 감옥에서 글을 썼으며 감옥안에서 글쓰기가 허락되지 않더라도 거기에서 견뎌된 영적, 정신적 혼란의 시간을 나중에 작품에 담아냈다. 책, 라디오, 텔레비전, 편지를 볼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감시하에서 면회도 허락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격리된 상태로 있다보면, 정신기능 장애가 생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격리상태가 몇 주가 넘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이유를 알 없는 피로를 호소한다. 어떤 사람들은 무감각 상태가 되다시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서서히 미쳐간다고 느낄 정도로 감정조절을 못한다. 오랜시간 격리상태에 있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는데 두려움을 느끼고,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상실이나 분리에서 비롯된 창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자극을 받아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 삶에서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자신이 가치있고 능력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고독속에서 내면의 탐구를 하며 창작활동을 할 때, 사람을 대신한 자연과 행복하게 결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작품에 드러낸다. 대부분의 창의적인 사람들이 성인기에 이르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피하고, 혼자 있으려하는 성향을 어느 정도 보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원만한 인간관계를 보이지만, 외향적인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친밀감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 때가 많다.  그들은 관계가 나빠질때 별로 혼란스러워 하지 않는다. 친밀한 인간관계에 삶의 의미를 과도하게 두지 않기 때문이다.

 

회피행동을 보이던 아이가 인간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삶에서 나름의 의미와 질서를 찾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수 있다. 생각이란, 채 성숙되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시들고 마는 민감한 식물이다. 사람은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를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할수 조차 없다. 혼자 있을 때 사람은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특징도 드러내지 못한다. 내향적인 위대한 창조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규정할 수 있으며, 자기언급을 통해, 즉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보다 자신의 과거 작품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룰수 있다. 이는 아이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상호작용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차츰 규정해 나가야 한다.

 

아기는 다른 사람에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누군가가 먹여주고, 따뜻하게 해주고, 씻겨주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개별성 또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원하는 것과 손에 넣는 것의 차이가 생길수 밖에 없다. 그래서 손에 넣기 위해 아이는 절박하게 울면서 도움을 요구하고, 동시에 혼자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해 줄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어린아이가 자기정의, 즉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일관된 정체성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엄마나 엄마의 대체물과 상호작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평생을 살면서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 정의와 일관된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확립해간다. 자기심리학의 창시자 하인즈 코헛은 아이가 건강하고, 안정되고, 일관된 개인성을 확립해가려면 무엇보다 '아이 경험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자기 대상'에게서 인정과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아이는 자아감을 분명하게 심어주는 부모나 부모 같은 인물과 상호작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이가 커가면서 확립해가는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여주면, 아이의 감정에 공감해 주고 아이의 요구에 적대적이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무조건 받아주지 않으면서도 다정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코헛은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이 과정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자기심리학에서는 자기-자기 대상의 관계가 한 개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리적 삶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영역에서 산소에 의존해 살다가 산소 없이 살기가 블가능 하듯이 심리적 영역에서는 자기 대상에 의존하다가 완전하게 독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정상적인 심리적 삶을 특징 짓는 발달은 자기가 자기대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기대상 관계의 성격이 변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코헛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불안을 '해체불안'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부모가 아이에게 미성숙한 반응을 보이거나, 아이의 입장이 되어 그 기분을 이해해 주지 않으면, 아이는 확고하고 일관된 개인성을 확립하지 못해 해체 불안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 된다고 주장하다. 정신분석 전문의는 환자의 경험과 느낌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환자의 상처받은 자아를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친밀한 애착 혹은 특별한 애정이 깃든 관계만이 한 사람의 삶에 의미를 준다.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 혹은 다른 돌보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이 어린시절에 아주 중요하며,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들과 만족스런 관계를 맺는 능력이 어느 정도는 이 상호적용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린시절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부모에게서 거부의 태도를 경험하면서 자란 아이들은 인간관계 이외의 것에 더 몰두하거나, 아니면 인간관계 맺기를 아주 힘들어 한다. 하지만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고 있고, 흥미로우며 자아존중감도 충족시켜 주는 일을 하고 있다면, 꼭 가깝고 친밀한 관계가 없다해도 만족스럽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예술작품이나 철학체계 혹은 우주의 이론이 어린시절에 상실을 겪었거나, 성인기에 다른 사람들과 유익한 상호작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보상 하려는 노력에서 생길 때,  일련의 작품이 대상을 대체할 수 있다.

 

아기들은 새로운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제공하는 대상에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그런 자극을 배고품이나 갈증같은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 혹은 접촉과 위안에 대한 갈망과 관계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안전한 애착을 느끼는 아이들은 불안해하지 않고, 엄마의 곁을 떠나 환경과 그 환경속의 대상들을 탐험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상적으로 균형잡힌 사람이라면, 인간관계와 관심사 모두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심이 인간관계의 실패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가까운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재능있는 사람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하는 역할 일부를 관심사가 떠맡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하고 성숙한다. 우리 삶의 진전은 아이, 청소년 , 배우자, 부모, 조부모와 같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된 우리의 역할로 정해진다. 예술가나 철학자는 스스로 성숙한다. 그들 삶의 진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작품의 성숙에 따라 정해진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독자적으로 전개하는데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설익은 감시와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내면세계를 보호 하려하며,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사상에 여간해서 영향받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도 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작품을 자아존중감과 개인적인 성취의 주요 요소로 여길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철학은 아주 난해한 주제다. 철학은 경험적인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새로운 이야기다.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연구하는 문제에는 완전하고, 영구적인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진전이 있다고 주장할 때 이는 어떤 문제가 명확해져서 이전의 접근방식 일부를 버려야 한다는 의미다. 과학은 진보하면서 이전 세대의 지식에 다음 세대가 지식을 더하고, 이런 식으로 지식이 통합되어 일반적인 구조를 이룬다. 불안 때문에 질서를 찾는데 집착하는 천재들이 있다. 그런 질서 추구가 처음에는 해체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주제에 대한 본질적인 흥미 혹은 유능하거나 독창적인 사람으로 인정받는데서 오는 성취감으로 추진력을 얻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시절에 어머니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은 덕에 다른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불신을 예외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아이가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마음껏 누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것도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에 그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다면, 그 아이는 자라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를 불신하게 되며,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신뢰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뉴턴이 바로 그랬다. 칸트, 비트겐슈타인, 뉴턴이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긴 했지만, 세사람 모두 독창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은 천재들이었다. 그들에게 아내와 가족들이 있었더라면 그처럼 빛나는 업적을 이루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추상적 개념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고독과 강력한 집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들을 비정상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