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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

태초부터 인간사회는 설계 되어 왔다.

모든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동시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현재의 문제가 과거 세대들의 문제와는 다르다고 여기고 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오늘 날에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특허 의약품들이 더 이상 듣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련하게 위기를 관리하려 하더라도 실제로는 우리가 항상 겪고 있는 믄제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항상 규칙들은 사전통지도 없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다른 것을 교체되곤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사실은 일단 배제되어 쓰레기 딱지가 붙은 사람이 완전히 자격을 갖춘 사회 구성원으로 되돌아 갈수 있는 길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핵심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일이 문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집안에 있는 도구와 자원만으로 이러한 재난을 피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이상 일시적인 하락의 문제, 경기과열과 또 다른 경기상승 사이의 경기후퇴 문제가 아니다. 세금, 보조금, 수당, 인세타브 따위로 땜질해 소비자 주도의 경기회복을 다시한번 불러오면, 사라져버리는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릴 일시적인 자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 손이 닿을수 없는 으로 멀리 옮겨간 것처럼 보인다.

 

안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다. 지식공장에서 생산품은 쓰레기와 구분되며, 이렇게 구분하는 주체는 잠재고객들의 관점과 요구와 욕망이다. 실용적 의도와 목적에도 불구하고 배제된 것은 더 이상 거기 있지 않게 된다. 인간의 이해라는 척도에 맞추어 다시 만들어지는 사회는 관리 가능한 동시에 관리를 필요로 한다. 자연은 좋든 싫든 알든 모르든 태초 이래로 복종시켜야할 대상이었다. 인간이 만들지 않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에 있고, 인간의 힘을 벗어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결국 자연이라는 관념이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였다. 농업은 인간이 땅으로부터 빼앗은 것을 사려깊게 돌려준다. 이와 반대로 채광 과정은 파괴적이며, 일단 캐낸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광업은 인간의 불연속성의 이미지를 나타내는것이다. 농업은 연속성을 대변한다하나의 낟알은 더 많은 낟알로 되돌아 오며, 한 마리의 양은 여러 마리의 양을 낳는다. 변한듯 해도 변한 것은 없다.

 

존재의 재확인과 재긍정으로서의 성장, 상실 없는 성장, 도중에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죽음은 재생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광업은 단점과 불연속의 전형이다. 새로운 것은 어떤 것이 버려지거나, 폐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태어날수 없다. 우리는 우선 광석을 함유하고 있는 땅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숲을 베어버리거나 불태우고, 광맥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땅을 한층 한층 파내야만 광석에 접근할 수 있다.  광업은 새로운 것의 탄생이 옛 것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가정아래 진행된다. 여분의 불필요한 쓸모 없는 것을 잘라내버림으로써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만족스럽고 좋은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어낸 것은 대리석판 한 개를 골라,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깎어내면 됩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쓰레기는 모든 창조의 산파인 동시에 극히 가공 할만한 장애물이다. 머리카락은 신체 일부일 때는 머릿기름을 바르고 빗고 매우 정성들여 치장하는 등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지만, 일단 잘려나가자마자 쓰레기가 된다.

 

현대세계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욕망과 결심을 담고 있다. 자기를 지금과 다르게 만들고, 고쳐 만들고 계속해서 다시 만들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현대의 조건은 끊임없는 움직이는 데 있다. 선택은 현대화 아니면 소멸일 뿐이다. 현대라는 시기의 역사는 계획 되거나, 시도 되거나, 추진 되거나, 완수 되거나, 실패 하거나, 폐기된 일련의 설계들로 점철되고 있다. 순전히 좋기만한 결과를 얻을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좀더 좋은 결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예측 불가능한 만큼 이득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도 수반하기 마련이다.  설계의 바탕이 되는 전략과 불가피한 결과는 행위가 낳은 물질적 산물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쓸모있는 것’과 ‘쓰레기’로 나누는 것이다. 과잉정보는 인간두뇌에 저장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분량이며, 심지어 전통적인 정보 저장소인 도서관 서가에 저장 되기에도 너무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자 기억장치가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월드와이드웹은 무한히 넓고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중인 정보-쓰레기통이 되고 있다. 정보 쓰레기의 생산은 모든 쓰레기 생산활동과 마찬가지로 자가발전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쓰레기를 처리하려는 노력이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든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야기는 쓰레기에 관심이 없다. 그것이 관심을 갖는 것은 생산품이지 쓰레기가 아니다. 두 종류의 트럭이 날마다 공장을 떠난다. 하나는 창고와 백화점으로 다른 하나는 쓰레기장으로. 우리를 둘러싼 이야기는 '첫 번째 종류의 트럭만 주목하라'고 우리를 훈련시켜 왔다. 반면 두번째 종류의 트럭에 대해서 우리는 쓰레기더미가 눈사태처럼 쓰레기산으로부터 무너져 내려와, 우리 뒷마당을 둘러싼 울타리를 뚫고 침범하는 경우에만 생각한다. 우리는 극히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레기를 처리한다. 즉 쓰레기를 보지 않음으로써,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 쓰레기는 모든 생산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비밀이다. 쓰레기는 그 엄청난 양 때문에 감추거나 은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쓰레기 처리 산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현대적 생산의 한 부문 인 것이다. 아무리 엄밀하게 나누려고 해도 해도 유용한 생산품으로부터 쓰레기를 분리시키는 경계는 회색지대이다.

 

설계작업이 중요한 것은 현존세계에 개선 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목표는 좋은 것이 차지하는 자리는 더 넓히고, 나쁜 것이 차지하는 자리는 더 좁히거나 없애는 데 있다. 나쁜 것이 나쁜 이유는 좋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쁜 것은 개선의 결과 발생한 쓰레기이다. 당연히 자연은 그것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자연법칙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들에 의해 폐지될 수 없다. 베이컨의 조언에 따르면 인간은 그러한 법칙들을 배워 인간의 이익에 맞게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적 결속의 형태를 설계할 때 적절하지 않은 사람은 쓰레기가 된다. 즉, 설계된 형태에 맞지 않거나 앞으로 맞지 않게 될 일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새롭고 전보다 향상된 인간적 결속 형태를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은 질서 구축이다. 질서란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제기능을 하는 상태다. 질서를 잡다는 물건을 정리해두거나 적절한 상태로 만들다, 규칙에  따라 배치하다. 조절하다. 다스리다. 관리하다 이다. 혼돈은 질서의 분신이며, 마이너스 부호가 붙은 질서이다. 즉 어떤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제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도 않은 상태이다.

 

모든 주도권은 규칙이 확고하게 쥐고 있다. 규칙이 현실에 선행한다. 법제정이 인간세계의 존재에 선행한다. 법은 설계이다.  분명하게 경계 지어져 있고, 알아보기 쉽게 표시되어 있고, 지도로 그려지고, 표지판이 있는 거주지를 나타내는 청사진이다. 법은 안과 밖을 나누는 선을 그림으로써 무법성이 존재한다. 무법성은 단순한 법의 부재가 아니다. 오늘날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 정체성이라는 공허한 원군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며, 모두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민족없는 국가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없는 민족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자들에 의해 억압되고 절멸될 수 있다. 한 민족의 운명은 오직 국가 정체성일 수 밖에 없고 민족 개념은 시민권 개념안에서 다시 명문화 되어야만 의미가 있다.